섬광과 함께 칠흑 같은 어둠이 숲을 갈랐다. 에르타는 신성력을 끌어모아 방어막을 펼쳤다.

"크아악!"

기이한 비명과 함께 나무들 사이에서 뛰쳐나온 몬스터, '밤의 추격자'가 투명한 장벽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칠흑 같은 가죽, 날카로운 발톱, 그리고 굶주림에 번들거리는 붉은 눈. 놈들은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젠장, 이렇게 많을 줄이야!"

옆에서 함께 싸우던 모험가가 검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그의 검이 몬스터의 옆구리를 베었지만, 놈은 비틀거릴 뿐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상처에서 피 대신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며 주변의 동족들을 더욱 광분시킬 뿐이었다.

에르타는 차갑게 식은 땀이 등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사제가 되기 위한 수행 여행은 신의 뜻을 헤아리는 고요한 여정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이처럼 피와 비명이 난무하는 생존의 현장이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주문을 외웠다. 그녀의 손끝에서 발산된 빛의 사슬이 몬스터 한 마리의 발을 묶었다.

"지금이에요!"

그녀의 외침에 모험가가 달려들어 몬스터의 목을 베었다. 하지만 그 순간, 다른 한 마리가 소리 없이 그녀의 등 뒤로 다가왔다.

그러나 에르타는 이번에는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이 번뜩였고, 손끝에서 또 다른 성스러운 광휘가 튀어나와 방패처럼 펼쳐졌다. 발톱이 빛의 장벽에 부딪혀 튕겨나가자 몬스터는 기괴한 포효를 내질렀다.

하지만 그 포효에 숲이 반응했다. 나무들이 흔들리고, 그 아래에서 더 많은 그림자들이 기어 나왔다.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무리는 이미 열 마리를 넘어서고 있었다.

모험가는 숨을 헐떡이며 외쳤다. "수색대는 늦는 건가! 에르타, 이대로면 포위당해!"

"후퇴하자고?"

에르타는 되묻지 않았다. 그녀는 대지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작했다. 빛의 기둥이 그녀를 중심으로 솟구쳤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틈을 이용해 모험가는 뒤를 돌아 탈출 경로를 확인했다. 하지만 몬스터들은 빠르고, 숲의 지형은 이미 그들에게 익숙한 듯했다.

한 마리가 모험가의 다리를 덮쳤고, 그는 쓰러지며 비명을 질렀다. 에르타가 몸을 날렸다. 성역의 빛이 번쩍이며 놈을 날려보냈다.

"일어나요! 여기서 죽을 순 없어요!"

그녀는 모험가를 일으키며 외쳤다. 그리고 다시 손끝에 신력을 모았다. 그러나 손끝은 떨리고, 심장은 마치 금방이라도 터질 듯 뛰고 있었다.

그때였다. 놈들 사이에서 유난히 덩치가 크고 날개를 지닌 몬스터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이 칠흑의 가죽으로 뒤덮여 있고, 등에는 뾰족한 골편이 줄지어 있었다. '밤의 주시자'—그녀는 본 적이 있었다. 전승에 따르면, 이 존재는 보름달이 뜬 날 숲의 사냥감을 대신 심판하는 전무후무한 존재.

그 괴물이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르자, 다른 몬스터들이 일제히 뒤따라 에르타와 모험가를 향해 돌진했다. 바람이 갈라지고, 피와 살점이 날렸다.

에르타는 마지막 남은 힘을 끌어모아, 지면을 두드리며 성역의 원형 마법진을 펼쳤다. 빛이 뻗어나가며 몬스터들의 몸을 녹이듯 태웠지만, 강대한 밤의 주시자는 그 속을 뚫고 다가왔다.

모험가는 절규했다. "에르타, 도망쳐! 지금이 아니면—"

하지만 그녀는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눈앞에 다가오는 괴물을 향해 마지막 기도를 올리며. 그 순간, 붉은 발톱이 그녀의 가슴에 박혔고, 둔탁한 충격과 함께 의식이 아득해졌다.

...

…에르타.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에르타는 천천히 눈을 떴다. 피비린내 나던 숲이 아니었다. 눈부신 샹들리에가 천장에 매달려 있고, 부드러운 현악기 선율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흙먼지 묻은 여행복은 온데간데없고, 몸에는 어깨를 드러낸 순백의 드레스가 입혀져 있었다. 이곳은… 왕궁의 연회장이었다.

주변에서는 수많은 귀족들이 가면을 쓴 채 왈츠를 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어딘가 기계적이었고, 가면 아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혼란스러워하는 에르타의 앞에 한 남자가 다가와 섰다.

"저를… 기억하시겠습니까."

백발과 짙은 피부. 몸에는 저주의 문양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레비안이었다. 꿈속의 그는 존재가 희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 선명한 모습으로 서서, 공허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저를 알아봐 주셨고, 앞으로도 기억할 거라 약속했습니다."

레비안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잡기도 전에, 화려한 장미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어느새 나타난 제라드가 그녀의 다른 편에 서 있었다. 그의 금발은 햇살처럼 빛났고, 그의 손에는 갓 피어난 장미 한 송이가 들려 있었다.

"에르타님. 이 장미는 저를 잊지 않을 겁니다. 당신처럼요."

그의 벽안에는 버려진 온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슬픔과 그녀에게만 보여주던 희미한 미소가 공존했다. 그는 세상에 홀로 버려진 존재가 아님을 느끼게 해준 유일한 빛.

그때, 오만한 발소리와 함께 실베르트가 그들 사이를 가르며 나타났다. 검은 장발과 루비 같은 눈동자. 그는 도도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기억이란 건 변하기 마련이지.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허세 너머에 숨겨진, 황위 계승에서 밀려나 숙청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완벽한 왕자의 가면 뒤에 가려진 여린 속내를 알아봐 준 것은 그녀뿐이었다.

세 남자가 그녀를 둘러쌌다. 그들의 배경으로 시끄럽던 음악이 멎고, 가면을 쓴 무용수들이 일제히 멈춰 서서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무도회. 베렐로테 가문의 장녀로서 가문의 대를 이을, 그리고 세 사람의 마음과 관계, 운명을 결정지을 단 한 사람을 '선택'해야만 했던 바로 그날의 무도회였다.

그제야 에르타는 깨달았다. 사제가 되기 위한 수행 여행은 마고르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끔찍한 선택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 도망치기 위한 가장 고결한 핑계였을 뿐이다. 레비안의 존재, 제라드의 삶, 실베르트의 미래. 그 모든 것을 짊어지는 대신, 그녀는 길 위로 도망쳤던 것이다.

그녀의 진심을 꿰뚫어 본 듯, 세 남자의 얼굴이 하나로 겹쳐졌다. 레비안의 공허함, 제라드의 슬픔, 실베르트의 불안이 담긴 눈동자가 오롯이 그녀를 향했다. 그들의 입술이 동시에 열렸다. 하나의 목소리가 되어, 고요한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왜 도망가?”

영애님의 선택

DLC

에필로그

태초의 신전

정해진 목적지

취중고백

왜 도망가?

다과회

허세 너머의 얼굴

장미꽃 속 상처

흔적 없는 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