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타 드레아 베렐로테는 언덕 위의 따스한 햇살 아래 앉아 빵 한 조각을 베어 물었다. 바삭한 빵 껍질이 부서지며 입안에 고소한 향이 퍼졌다. 그녀는 빵을 천천히 씹으며 멀리 펼쳐진 푸른 들판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며 속삭이는 소리가 마치 오래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듯 했다.
사제가 되기 위한 수행 여행은 예상보다 고되었다. 명문가 베렐로테의 장녀이자 차기 가주 후보로 자랐지만, 그녀는 스스로 부족하다 생각했다. 마고르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것을 보고, 느껴야만 했다. 그런 그녀에게 이 언덕은 잠시의 안식처였다.
빵 한 조각과 함께 기억의 조각들이 떠올랐다. 레비안. 오래전 함께했던 친구의 얼굴이 아련하게 스쳤다. 그와의 첫 만남은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었다. 에르타의 생일, 열 살의 생일 잔치였다.
* * *
베렐로테 저택의 연회장은 화려한 꽃장식과 마력 램프의 은은한 빛으로 가득했다. 수많은 귀족들이 에르타의 열 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어린 에르타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손님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른들의 웃음소리와 음악 소리가 섞여 연회장은 활기로 넘쳤다.
축하객들 사이에서 에르타의 시선은 한쪽 구석에 조용히 서 있는 가족에게 닿았다. 그들은 다른 손님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에르타는 그들의 외모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짙은 피부색과 백발, 그리고 몸에 새겨진 문신들이었다. 그들은 연회장의 화려함과는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어머니는 그들을 흘끗 보더니 에르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저분들은…… 중요한 손님은 아니란다."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 에르타는 의아했다. 연회장에 초대된 모든 손님은 소중한 존재라 배웠는데, 어째서 저들은 예외인 걸까. 에르타는 의문을 품은 채 발걸음을 그들 쪽으로 옮겼다. 하지만 어머니가 강하게 손을 잡았다. 에르타는 그들을 더 이상 자세히 볼 수 없었다.
그날 밤, 에르타는 침대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낮에 보았던 그 가족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들에 대해 물어보려 했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는 대화를 피했다. 마치 그들의 존재를 입 밖에 내는 것조차 꺼리는 듯했다.
다음 날 아침, 에르타는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서재로 향했다. 가문의 역사와 관련된 고문헌들이 보관된 곳이었다. 에르타는 어제 본 가족의 특징을 떠올렸다. 짙은 피부, 백발, 문신. 그 특징에 해당하는 가문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수많은 가문의 기록을 넘기던 중, 에르타의 손이 멈췄다. ‘아스틴 가문’이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기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아스틴 가문: 고대에 소로몬의 열쇠 봉인 마법을 이용해 신의 분노를 샀던 가문. 그 대가로 가문의 모든 구성원은 존재가 점차 소멸하는 저주에 걸렸다. 이 저주는 사용자의 계약 또는 진심 어린 선택으로만 해방될 수 있다.'
에르타는 기록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 어제 본 그 가족이 아스틴 가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녀는 더 자세한 기록을 찾아보았다. 아스틴 가문의 선조가 영웅이었다는 내용도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은 과거에 큰 마법을 사용하여 나라를 구했지만, 그 대가로 가문에 저주가 내려졌다는 것이었다. 영웅이 된 대가는 혹독했다. 그들의 희생은 잊혀지고, 저주만이 남았다.
에르타는 기록을 덮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째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던 걸까? 혹은 알아보려 하지 않았던 걸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며칠 뒤, 에르타는 조용히 아스틴 가문의 저택을 찾아갔다. 저택은 낡고 황량했다. 주변에는 사람의 발길이 뜸했고, 덤불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마치 그 어떤 이의 관심도 받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대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자,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낡은 문이 열렸다. 문틈으로 희미한 그림자가 비쳤다. 백발의 소년, 바로 연회장에서 보았던 그 아이였다. 그의 눈은 깊은 공허함을 담고 있었다.
소년은 에르타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낯설었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했다. 에르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에르타 드레아 베렐로테입니다. 당신은 레비안이신가요?"
소년은 에르타의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에르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정수리 위에는 여전히 백발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에르타는 그의 침묵에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감정이 그녀를 이끌었다.
"어제 저희 집 연회장에서 뵙게 되었어요. 당신 가족분들께 저희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무례하게 대해서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레비안의 눈에 아주 희미한 동요가 스쳤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간신히 한 단어가 흘러나왔다.
"……기억……."
그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에르타는 그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제가… 당신을… 기억합니다."
레비안의 목소리는 희미했지만, 그 한 마디에는 굶주린 듯한 애절함이 담겨 있었다. 에르타는 그의 말에 놀랐다. 분명 그들은 처음 만나는 사이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과 목소리는 그녀에게 낯설지 않았다.
"어떻게… 저를 기억하시나요?"
에르타의 질문에 레비안은 고개를 숙였다.
"당신은… 저를… 알아보…셨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절제되어 있었지만,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에르타는 그제야 깨달았다. 연회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자신만이 그들을 알아보려 했고, 기억하려 했다는 것을.
레비안의 눈빛에서 공허함이 사라지고, 아주 작지만 분명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마치 오래도록 물을 찾던 나무가 작은 빗방울을 만난 듯한 모습이었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 아주 미미한 변화가 일었다.
에르타는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의 주변에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느껴지는 그런 기운이 없었다. 마치 세상으로부터 점차 지워지고 있는 듯한 희미한 인상이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소년에게는 그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저는 당신을 알아보았고, 앞으로도 기억할 거예요."
에르타의 말에 레비안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처음으로 작은 빛이 서렸다. 그 빛은 희망이거나, 혹은 아주 오랜 외로움 끝에 찾아온 위로와도 같았다.
"당신 이름이… 레비안이라고요?"
에르타는 조용히 물었다. 레비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마치 그림자처럼 흐릿했지만, 분명한 미소였다.
"레비안. 좋아요. 제 친구가 되어줄래요?"
에르타는 손을 내밀었다. 레비안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을 에르타의 손 위에 포갰다. 그의 손은 단단했지만, 동시에 차가웠다. 마치 오랜 시간 동안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손 같았다.
그때부터 에르타와 레비안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어린 에르타는 이후에도 종종 레비안을 찾아갔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몰래 찾아가기도 했다. 레비안은 과묵했지만, 에르타에게는 마음을 열었고 가끔씩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가문의 저주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의 존재가 점차 희미해지는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에르타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 아파했다. 그녀는 레비안이 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겠다고 다짐했다.
* * *
언덕 위에서 에르타는 빵 부스러기를 털어내며 생각에 잠겼다. 레비안의 희미한 미소와 차가웠던 손의 감촉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여행의 끝에서, 자신은 그들을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베렐로테 가문의 딸로서, 그리고 마고르의 뜻을 받드는 사제로서, 그녀에게 주어진 선택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에르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내딛는 걸음마다 사그락거리는 풀소리가 들렸다. 멀리 보이는 길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녀의 선택은 이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