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타는 터덜터덜 여관 문을 열었다. 며칠간 이어진 수행 여행은 그녀를 지치게 했다. 낡은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여관 안은 희미한 램프 불빛 아래 몇몇 여행객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술잔을 기울이거나 이야기꽃을 피우며 저마다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손님. 방은 예약하셨습니까?”
여관 주인은 낡은 안경 너머로 에르타를 응시했다. 에르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예약 종이를 내밀었다. 주인은 종이를 살펴보더니 열쇠를 건넸다.
“2층, 가장 안쪽 방입니다. 평화로운 밤 되시길 바랍니다.”
에르타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계단을 올랐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은 그녀의 피로를 더욱 가중시키는 듯했다. 복도를 따라 가장 안쪽 방에 도착하자, 에르타는 열쇠를 꽂아 돌렸다. 차가운 금속이 손끝에 닿는 감각이 생생했다.
방 안은 협소했지만 아늑했다. 작은 창문 너머로 밤하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에르타는 짐을 풀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딱딱한 침대였지만, 발이 닿는 순간부터 몸의 긴장이 풀렸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그녀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순간,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레비안과의 첫 만남만큼이나 선명한 기억. 아름다운 장미 향기가 가득했던, 제라드와의 첫 만남이었다.
* * *
“에르타, 그쪽은 위험하단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다급했지만, 에르타는 이미 저택의 뒤뜰을 벗어나고 있었다. 열두 살의 호기심은 그 어떤 경고도 무시하게 만들었다. 뒤뜰 끝에 늘어선 낡은 담장 너머에는 버려진 온실이 있었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길을 따라 온실로 향했다.
온실은 한때 아름다운 장미들이 가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곳저곳 유리창이 깨져 있었고, 덩굴들이 벽을 뒤덮고 있었다. 폐허가 된 온실 안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들였다. 퀘퀘한 흙냄새와 부패한 식물들의 향기가 섞여 코를 찔렀다.
그때였다. 온실 안쪽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에르타는 숨을 죽이고 인기척이 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깨진 유리창 사이로 햇살이 비집고 들어오는 곳. 그곳에 소년 하나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소년의 손에는 작은 모종삽이 들려 있었다. 그 모종삽은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소년은 주변의 무성한 잡초들을 뽑아내고 있었다. 주변에는 이제 막 싹을 운 듯한 어린 장미 묘목이 세 그루 심겨 있었다. 소년의 금발 머리카락은 햇살 아래 반짝였다. 흙먼지로 얼룩진 소년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옆에는 허름한 삽과 물통이 놓여 있었다.
에르타는 조심스럽게 소년에게 다가갔다. 소년은 에르타의 인기척을 알아채지 못한 듯 장미 묘목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너도, 나도…”
그의 목소리는 희미했지만, 에르타는 그 안에 담긴 깊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에르타는 소년의 어깨를 조심히 두드렸다.
“누구세요?”
소년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벽안은 놀라움과 동시에 깊은 경계심을 담고 있었다. 소년은 황급히 몸을 숙여 무언가를 감췄다.
“나는… 에르타 드레아 베렐로테입니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소년은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숙였다.
“제라드라고 합니다. 제라드 라 벨루아.”
그의 목소리는 작고 떨렸다. 에르타는 소년의 손이 흙으로 더럽혀져 있는 것을 보았다. 소년의 옷차림은 허름했지만, 그의 손길은 묘목을 대하는 것이 마치 귀한 보석을 다루는 듯 조심스러웠다.
에르타는 소년의 손에 들려 있던 모종삽을 가리켰다.
“이곳에서 무엇을 하시는 거예요?”
제라드는 주저하더니 조용히 말했다.
“버려진 장미 묘목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왜요? 이곳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곳인데.”
“이 묘목들을 돌봐주지 않으면, 죽을 테니까요.”
소년의 눈빛은 깊은 슬픔을 담고 있었다. 에르타는 그 눈빛에서 자신을 찾아보았다. 마치 자신을 대신해 묘목들을 돌보는 듯한 그의 모습이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의 눈빛은 묘목들을 보살피는 행위가 단순한 연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그 자신을 돌보는 것과도 같았다.
에르타는 그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소년은 경계심을 풀지 않은 채 그녀를 흘끗거렸다. 에르타는 그의 손에 들린 묘목을 바라보았다. 앙상한 가지에 흙이 묻어 있었다.
“잎사귀가 많이 상했네요.”
에르타의 말에 제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온실이 망가지면서 햇빛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물도 주지 못해서요.”
“돌보면 다시 살아날까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해봐야죠.”
소년의 목소리에는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단단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에르타는 그의 눈빛을 보며 알 수 있었다. 이 묘목들은 단순히 식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소년 자신의 삶과 같았다.
“그럼 제가 돕겠습니다.”
에르타의 말에 제라드는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희미한 감동이 스쳐 지나갔다.
“베렐로테 가문의 영애께서 굳이 이런 일을….”
“저는 에르타입니다. 영애라고 부르지 마세요. 그리고… 이곳의 장미들이 다시 살아나는 걸 보고 싶어요.”
에르타는 삽을 들었다. 흙을 파내자 흙에서 짙은 흙냄새가 올라왔다. 소년은 잠시 망설이더니 함께 삽을 들었다. 그들의 손이 흙 속에서 움직였다. 점차 깨끗해지는 묘목의 주변을 보며 작은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에르타는 제라드를 보았다.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장미만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제라드의 얼굴에도 새로운 감정인 미소가 피어났다.
“감사합니다, 에르타.”
그의 목소리는 전보다 훨씬 또렷하고 부드러웠다. 에르타는 그의 미소를 보며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낡은 온실 안, 햇살 아래서 소년과 소녀는 함께 흙을 만지고 묘목을 심었다. 그들은 더 이상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둘만의 비밀스러운 정원이 피어났다. 이후로 에르타는 종종 온실을 찾아 제라드를 도왔다. 제라드는 그녀에게 온실의 비밀스러운 장미들을 보여주었고, 에르타는 그 장미들이 점차 생기를 되찾는 모습을 보며 기뻐했다. 그 과정에서 제라드는 점차 그녀에게 마음을 열었다. 그는 자신의 불안정한 위치, 가문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서자로서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미소는 오직 그녀에게만 보여지는 것이었다. 에르타는 그런 제라드를 보며 그가 세상에 홀로 버려진 존재가 아님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녀는 그에게 빛이 되어주고 싶었다.
* * *
침대에 누운 에르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희미한 달빛이 창문을 통해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 제라드의 미소, 그리고 그의 눈에 비치던 한줄기 희망. 그것은 어린 시절 그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여행의 끝에서, 자신은 그를 선택할 수도 있다는 것을.
차디찬 여관의 밤공기가 피부에 와 닿았다. 에르타는 이불을 더욱 끌어당겼다. 잠 못 이루는 밤, 그녀의 마음속에는 레비안과 제라드의 얼굴이 교차했다. 두 사람 모두 그녀에게는 특별한 존재였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그녀의 선택에 의해 그들의 운명이 결정될 처지에 놓여 있었다.
고단한 하루였지만, 그녀는 잠들 수 없었다. 내일은 또 어떤 인연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 에르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녀는 그들을 잊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한, 그들은 존재할 것이다. 베렐로테 가문의 딸로서, 그리고 마고르의 뜻을 받드는 사제로서, 그녀에게 주어진 선택의 무게는 더욱 무겁게 다가왔다.
에르타는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아 뒤척였다. 그녀가 지나온 길, 그리고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 그 길 위에서 그녀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별이 빛나는 밤이었다. 여관 밖에서는 희미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에르타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