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조차 숨죽인 깊은 밤이었다. 숲속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멀리서 들려오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에르타는 모닥불 옆에 앉아 차가운 손을 쬐었다. 불꽃이 흔들릴 때마다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낮에는 강행군을 펼쳤지만, 밤이 되자 피로가 밀려들었다.
“이곳은 위험합니다. 잠시 쉬어가는 건 가능하지만, 밤새 머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함께 여행하는 모험가 한명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에르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쉬어야 했다. 지친 몸으로는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알고 있습니다. 잠시만 눈을 붙이고 새벽에 다시 출발할 겁니다.”
에르타는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셨다. 차가운 공기가 폐 속으로 스며들었지만, 목을 타고 흐르는 따뜻한 기운이 몸을 이완시켰다. 그녀는 모닥불의 불꽃을 바라보며 옛 기억을 떠올렸다. 화려한 연회장에서 처음 마주했던, 도도하고 자존심 강했던 소년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와의 첫 만남은 벌써 6년 전의 일이었다. 에르타가 열다섯 살 되던 해, 실베르트 왕자의 생일 연회에서였다.
* * *
왕궁의 연회장은 눈부신 마력 램프의 빛으로 가득했다. 천장에는 거대한 샹들리에가 황금빛을 뿜어냈고, 곳곳에는 희귀한 꽃들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에르타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연회장에 들어섰다. 수많은 귀족들이 저마다 화려한 예복을 입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베렐로테 가문의 영애께서 오셨군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르타는 고개를 돌렸다. 엘리시스 여왕이 미소를 띠고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으며, 머리에는 섬세한 금으로 만든 왕관이 얹혀 있었다. 그녀의 미소는 모든 이를 아우르듯 포용적이었다.
“여왕 마마, 부르심에 감사드립니다.”
어머니가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에르타도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생일 축하 연회에 와주셔서 제가 더 기쁩니다. 실베르트가 당신들을 만나면 기뻐할 거예요.”
여왕은 친근하게 말했다. 에르타의 시선은 연회장 중앙에 서 있는 소년에게 향했다. 검은 장발에 붉은 눈동자. 화려한 외투를 걸친 채 주위의 어린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가 바로 실베르트 왕자였다.
에르타는 그의 모습에서 어딘가 불편함을 느꼈다. 그는 모든 이에게서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경직되어 보였다. 마치 가면을 쓴 듯 자연스럽지 못했다.
어머니는 에르타의 손을 잡고 실베르트 왕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왕자가 그녀에게 가까워지자, 에르타는 그가 여전히 뻣뻣하게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실베르트, 이쪽은 베렐로테 가문의 에르타 영애란다.”
어머니가 부드럽게 소개했다. 실베르트는 에르타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의 동작은 완벽하게 예의 바랐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베렐로테 영애.”
그의 목소리에도 감정의 동요가 없었다. 에르타는 잠시 그의 붉은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 눈동자 속에는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숨겨져 있는 듯했다.
연회가 시작되고, 사람들은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에르타는 실베르트 왕자에게 다가갔다. 그는 여전히 주위 사람들의 찬사를 받으며 서 있었다.
“왕자님, 오늘 생신 축하드립니다.”
에르타가 말했다. 실베르트는 고개를 돌려 에르타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감각했다.
“감사합니다, 베렐로테 영애. 베렐로테 가문은 마력 순환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지요.”
그의 말은 예의 바른 인사였지만, 어딘가 사무적인 느낌을 주었다. 에르타는 그의 말투에서 묘한 허세를 느꼈다. 마치 자신을 지키기 위해 두꺼운 벽을 쌓아 올린 것만 같았다.
“왕자님께서는 항상 단정해 보이십니다.”
에르타가 담담하게 말했다. 실베르트의 붉은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그의 입술이 살짝 움직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르타는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덤덤했지만, 미세하게 경직된 기운이 느껴졌다.
“제가 왕자님의 예복을 칭찬하지 않은 것이 불쾌하신가요?”
에르타가 재차 물었다. 실베르트는 눈을 들어 에르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당황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어린 실베르트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은 에르타에게 의외였다.
“그럴 리가요. 베렐로테 영애의 말씀은 항상 정확하시더군요.”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신경질적으로 들렸다. 에르타는 그의 대답에서 그의 자존심이 상했음을 눈치챘다.
이후 에르타는 왕궁에서 종종 실베르트 왕자를 만나게 되었다. 만날 때마다 그는 완벽한 태도와 도도한 말투를 유지했다. 한 번은 에르타가 그의 서재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책상에 앉아 두꺼운 고문서를 읽고 있었다.
“왕자님, 독서를 즐겨 하시는군요.”
에르타가 말했다. 실베르트는 고개를 들어 에르타를 보았다. 그의 표정은 금세 평소의 무감각한 얼굴로 돌아왔다.
“이는 제가 알아야 할 지식입니다. 즐거움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에르타는 서재 안을 둘러보았다. 많은 책들 사이에서 한 권의 그림책이 눈에 들어왔다. 동화책처럼 아기자기한 그림이 그려진 책이었다.
“저 책은 무엇인가요?”
에르타가 그림책을 가리켰다. 실베르트의 얼굴이 순간 뻣뻣하게 굳었다.
“그것은… 하녀가 실수로 두고 간 것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빠르게 이어졌다. 실베르트는 황급히 그림책을 집어 서랍 속에 넣어버렸다. 에르타는 그의 행동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왕자님께서 이런 종류의 책을 읽으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에르타가 조용히 말했다. 실베르트의 붉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의 뺨에는 아주 미세하지만 붉은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에르타의 시선을 피하려 애썼다.
“저는… 그런 책은 읽지 않습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작아져 있었다. 에르타는 그에게서 권위 너머의 모습을 발견했다. 도도함과 허세 뒤에 숨겨진, 상처받기 쉬운 여린 감정이었다. 그는 완벽한 왕자가 되고 싶어 했지만, 그 역시 여느 동갑내기 아이들처럼 순수하고 여린 부분이 있었다. 그는 그런 자신의 일부를 세상에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 듯 보였다.
그날 이후, 에르타는 실베르트 왕자의 행동과 말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의 허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막이었다는 것을. 그는 완벽한 왕자로서의 모습만을 보여주려 했지만, 그의 내면에는 늘 불안함과 상처가 있었다.
* * *
모닥불의 불꽃이 이글거렸다. 에르타는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불 속으로 던져 넣었다. 나무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재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실베르트 왕자의 도도한 눈빛과 그 속에 숨겨진 불안한 감정이 교차하는 밤이었다.
그는 황위 계승에서 밀려났다. 그 도도했던 왕자가 이제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단 하나의 기회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녀의 선택만이 그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었다. 에르타는 그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가 스스로를 증명할 기회를 잃는다면, 그의 삶은 어떻게 될까. 숙청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무겁게 다가왔다.
숲속의 밤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에르타는 무릎을 끌어안고 생각에 잠겼다. 레비안, 제라드, 그리고 실베르트. 세 명의 남자들의 얼굴이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각기 다른 아픔과 사연을 지닌 그들. 그리고 그들 모두 그녀의 '선택'이 절실한 존재들이었다.
베렐로테 가문의 장녀로서, 그리고 마고르의 뜻을 받드는 사제로서. 그녀의 선택은 단순한 개인의 선택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고르의 순환 속에 놓인, 신성한 의무이기도 했다.
하늘에는 별들이 무수히 박혀 있었다. 길고 긴 밤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 다음 목적지로 향할 시간이었다. 에르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동료 모험가도 일어섰다. 그녀의 발걸음은 결연했다. 이 여행의 끝에서, 그녀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그녀는 아직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의 선택은 모두의 운명을 바꿀 것이라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