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헬리오(20살)의 1인칭 시점 | 제국력 941년 6/6 • 오전 4시 30분 • 투기장 감옥 ]
숨 막히는 밤이 지나고 있었다. 악몽의 잔재가 끈적하게 달라붙어 정신을 괴롭혔다. 차가운 돌바닥에 흘린 땀이 식어 몸이 떨렸다. 옆구리의 상처가 쿡쿡 쑤셨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등 뒤에 벽이 닿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조금 진정이 되었다. 여전히 어둠이 짙었지만, 희미하게 동이 터오고 있음이 느껴졌다.
축축한 공기 속에 썩은 피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뒤섞여 떠돌았다. 다른 감옥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신음소리만이 이 지독한 정적을 깨뜨렸다.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럴 기운도,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찢어진 옆구리를 손으로 누르며 고통을 견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저 멀리 복도 끝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규칙적이고 거친 소리였다. 간수들이 오는 소리였다. 새벽에 간수들이 움직이는 경우는 드물었다. 보통은 해가 중천에 뜰 때쯤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몸을 더욱 벽 쪽으로 붙이며 경계심을 높였다.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졌다. 복도에는 횃불이 없어 어두웠지만, 간수들이 들고 온 휴대용 등불의 희미한 빛이 감옥 방향으로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두 세 명의 간수들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 그들은 무언가 하얀 것을 이고 있었다. 천으로 싸맨 것인지, 아니면 원래 하얀 것인지 어둠 속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간수들이 내 감옥 바로 옆 철창 앞에 멈춰 섰다. 그들이 들고 온 하얀 것을 그대로 철창 안으로 던져 넣었다. '쿵'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마치 물건을 던지듯, 거칠고 무심한 손길이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저렇게 다루는 것을 보니 물건은 아닌 것 같았다. 사람인가. 설마 새로운 노예인가.
호기심보다는 경계심이 앞섰다. 새로운 존재는 언제나 위험을 동반했다. 나는 던져진 하얀 형체를 향해 눈을 돌렸다. 희미한 등불 빛 덕분에 이제 조금 더 잘 보였다. 하얀 천은 아니었다. 사람의 몸이었다.
긴 백발이 차가운 돌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새하얀 피부는 창백해 보였다. 길고 하얀 속눈썹이 뺨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여자인가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어깨와 목선을 보니 남자가 맞았다. 대략 열여덟 살 정도로 보였다. 선이 얇지는 않았지만, 투기장에서 볼 수 있는 거친 남자들과는 달랐다. 마치 섬세한 조각상 같다고 할까.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의 머리 위쪽에 무언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털복숭이 귀였다. 연회색빛 큼직한 점박이 무늬가 있는 하얀 동물의 귀였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서는 두꺼운 꼬리가 축 늘어져 있었다. 수인이었다.
순간적으로 눈을 크게 떴다. 수인은 세할란 제국에서 극히 희귀한 존재였다. 특히 이렇게 빼어나게 아름다운 수인은 더욱 보기 힘들었다. 귀족들에게는 엄청난 가치를 지닌 존재였다. 요즘 밀렵꾼들이 성행한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다. 등 뒤의 꼬리와 머리 위의 귀 모양을 보니, 설표 수인 같았다. 희귀한 종족 중에서도 손꼽히는 종이었다.
간수들은 던져 넣은 수인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철창 문을 닫고 떠나갔다. 다시 복도는 어둠에 잠겼다. 수인은 여전히 미동 없이 쓰러져 있었다. 나는 다시 벽에 기대어 앉았다. 새로운 노예가 나타난 것이 나에게 무슨 영향을 미칠까 생각했다. 혹시 나랑 싸움을 붙이려는 건가? 아니면 귀족들에게 비싼 값에 팔아넘길 준비를 하는 건가? 어느 쪽이든 귀찮은 일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하려 했다.
막 눈을 감으려던 그때였다. 나지막하고 약간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윽... 여긴..."
쓰러져 있던 수인이 눈을 뜬 모양이었다. 목소리는 맑았지만 힘이 없었다. 고통에 찬 신음소리도 섞여 있었다. 나는 눈을 뜨지 않고 가만히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새로운 존재의 소리였다. 낯설었지만, 어쩐지 날카롭지 않은 소리였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도 없었고, 그럴 의향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새벽의 공기 속에서 새로운 존재의 숨소리를 느끼고 있었다. 그가 왜 여기에 왔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지금 나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살아남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목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