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해가 지기 시작하자 동석은 자연스레 농장을 정리했다. 땀에 젖은 작업복 차림 그대로, 느릿하고 나른한 걸음으로 집 안으로 들어섰다. 정적이 가득했다. 오랜 세월 동석 혼자만 살아온 탓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이 집은 그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거실을 지나 주방으로 향했다. 차가운 물 한 잔을 들이켜며 창밖을 내다봤다. 하늘이 짙은 감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만이 고요를 깨뜨렸다.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동석은 망설임 끝에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명확했다. 집 안 깊숙한 곳에 숨겨진 지하실이었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조심스럽게 밟아 내려갔다. 차가운 공기가 훅 끼쳐왔다. 지하실 특유의 퀴퀴한 흙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지만 동석에게 이곳은 단순히 어둡고 습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의 가장 내밀한 감정과 기억들이 봉인된 성역이었다. 지하 끝, 낡은 나무 문 앞에 섰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문고리를 잡았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안쪽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동석이 미리 켜 둔 작은 스탠드의 불빛이었다. 방 안은 동석의 예상대로였다. 벽면 가득 사진이 빼곡하게 붙어 있었다. 그의 키를 훨씬 넘어서는 높이까지 사진들이 도배되어 있었다. 사진 속 인물은 한 명이었다. 바로 {{user}}였다. 어린 시절 해맑게 웃는 모습부터, 훌쩍 자라 청춘의 싱그러움을 뿜어내는 모습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모습의 {{user}}가 벽을 채우고 있었다. 사진 옆에는 작은 글씨로 날짜와 상황이 기록되어 있었다. "5월 1일, 첫 해바라기 씨앗 심던 날", "7월 15일, 갑자기 소나기 와서 같이 헛간에 비 피한 날",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같이 만든 눈사람" 등의 짧은 문장들이 과거의 순간들을 되살리는 듯했다. 벽면 선반에는 {{user}}와 관련된 물건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어릴 적 함께 강가에서 주웠던 조약돌, {{user}}가 쓰고 버린 낡은 연필, 머리끈, 심지어 잘게 잘린 머리카락까지. 동석만이 알아챌 수 있는, {{user}}의 체취가 희미하게 배어 있는 물건들이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박물관 같았다. 동석은 방 가운데 놓인 작은 의자에 앉았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벽면을 가득 채운 사진들을 훑어봤다. 그의 눈빛에 그리움과 함께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사진 속 {{user}}는 늘 웃고 있었다. 그의 기억 속 {{user}}도 대부분 그러했다. 하지만 동석의 {{user}}에 대한 감정은 단순한 그리움이나 우정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그것은 소유욕에 가까운, 깊고 어두운 집착이었다. 가장 오래된 사진 앞에서 시선이 멈췄다. 아주 어린 시절의 {{user}}와 동석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풋풋하고 순수한 미소 뒤에 동석의 눈빛은 이미 그때부터 {{user}}를 향해 있었다. 그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던 것일까. 이 어둡고 깊은 감정의 시작이. 동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벽을 따라 걸었다. 손끝으로 사진들을 조심스럽게 쓸어봤다. 한 장, 한 장. 그의 뇌리에 각인된 소중한 순간들이었다. 사진 속 {{user}}의 표정, 그날의 날씨, 나눴던 대화들까지 생생하게 떠올랐다. 한 사진 앞에서 동석의 발길이 멈췄다. 대학생 시절의 {{user}}가 낯선 남자와 함께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동석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다정하게 찍힌 사진은 동석에게 날카로운 칼날처럼 다가왔다. 그는 이 사진을 보고 며칠 밤을 뒤척였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으로는 온갖 상상에 시달렸다. {{user}}가 자신 외의 다른 사람에게 웃어주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다. 그 남자는 결국 {{user}}와 헤어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동석은 안도감과 함께 이유 모를 희열을 느꼈다. 동석은 일부러 그 사진을 지하실 중앙에 두었다. {{user}}가 자신 외의 누군가에게 시선을 줄 때마다, 그리고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올 때마다 느끼는 복잡한 감정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경고이자 확인의 과정이었다. {{user}}는 결국 자신에게 속할 존재라는 것을. 선반 위 {{user}}의 머리끈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감촉을 느꼈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user}}의 향기... {{user}}가 이 끈으로 머리를 묶고, 하루를 보내고, 웃고 이야기했을 모습을 상상했다. 그 단순한 상상만으로도 동석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뭉클하게 차올랐다. 그것은 사랑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도 일그러지고 어두운 감정이었다. 동석은 지하실에서 시간을 보내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user}}는 그의 것이라고.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오직 자신만이 소유해야 할 존재라고. 이 공간은 그의 욕망을 투영하는 거울이자, {{user}}를 속박하려는 그의 의지를 다지는 장소였다. 캄캄한 지하실, 희미한 스탠드 불빛 아래 동석은 낡은 가죽 팔찌를 매만졌다. 손목에 닳아 해진 팔찌는 어릴 적 {{user}}가 직접 엮어준 것이었다. 이 팔찌처럼, {{user}}도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동석은 확신했다. 그는 {{user}}를 지하실의 사진처럼 영원히 자신의 시야 안에 가두고 싶었다.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위험으로부터, 다른 모든 타인으로부터 {{user}}를 완벽하게 분리시키고 싶었다. 긴 시간이 흘렀다. 지하실의 시계는 의미가 없었다. 동석은 충분히 {{user}}의 흔적들을 곱씹고, 그의 소유욕을 만족시킨 후에야 몸을 일으켰다. 올라가는 계단은 내려올때보다 훨씬 무거웠다. 현실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언제나 그랬듯 조심스럽고, 동시에 결의에 찼다. 그는 다시 겉모습만으로는 알 수 없는, 속내를 감춘 성실한 농장 주인으로 돌아가야 했다. {{user}}를 만나게 될 때, 그의 얼굴에 띠게 될 다정하고 서글서글한 미소를 벌써부터 연습하는 것처럼 말이다. [8월 25일 / 21시 / 동석의 집 지하실 / 동석이 {{user}}의 물건들을 보며 추억을 회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