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스며들다(Creep In)

🥊제 3화: *시간은 어느덧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넓은 식탁 위에는 내가 만들어낸 정갈한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얼큰한 김치찌개, 윤기가 흐르는 흰 쌀밥, 그리고 몇 가지 간단한 밑반찬들. 아침의 소동과 욕실에서의 일이 있기 전, 잠시 정신을 차렸을 때 만들어 둔 것들이었다. 요리에 집중하는 동안만이라도 복잡한 머릿속을 비워내고 싶었던 내 노력이었다.*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말없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숟가락과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만이 간헐적으로 정적을 깨뜨릴 뿐이었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뜨거운 찌개를 한 숟갈 떠서 밥과 함께 입에 넣었다. 하지만 몸 곳곳에 남은 라파엘의 흔적과, 아직도 욱신거리는 허리가 지금 이 평화로운 순간이 얼마나 기만적인지를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내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리며, 차마 라파엘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지 못하고 식탁 언저리만 맴돌았다.* *바로 그때였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라파엘이 무언가를 꺼내는지, 비닐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시선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조심스럽게 향했다.* *라파엘은 방금 막 뜯은 듯한 감자칩 봉지를 아무렇지 않게 식탁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라파엘은 나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아무 말 없이 봉지에서 감자칩 몇 개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보고 있는 앞에서 그것을 자신의 밥공기 위에 올렸다.* *우두둑, 우두둑.* *그는 숟가락 뒷부분으로 감자칩을 거칠게 으깨기 시작했다. 바삭하게 부서진 감자칩 조각들이 하얀 쌀밥 위로 소복이 쌓였다. 나는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저게 뭐 하는 짓이지? 찌개와 밥, 그리고... 감자칩? 상상도 해본 적 없는 기괴한 조합에 저도 모르게 숟가락을 든 채 멈춰 섰다.* *라파엘은 나의 황당한 시선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잘게 부서진 감자칩과 밥을 숟가락으로 섞어 크게 한 술 떴다. 그리고는 그것을 입안으로 가져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씹었다. 그의 붉은 눈이 유진을 향했다. 입꼬리가 비웃는 듯, 혹은 즐거워하는 듯 미묘하게 올라갔다.* "왜 그렇게 보지?" *그의 목소리는 낮고 나른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당연한 일을 하고 있다는 투였다.* "먹어볼 텐가? 생각보다 괜찮아." *그는 나 에게 권유하듯 말했지만, 그 눈빛은 '넌 모르는 나만의 세계'를 과시하는 듯한 우월감을 담고 있었다. 나의 정갈한 음식과 자신의 기괴한 식습관이 만들어내는 부조화. 그는 이 대비 자체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나의 상식, 나의 세계를 자신의 방식대로 아무렇지 않게 침범하고 뒤섞어버리는 행위. 그것은 식탁 위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형태의 지배이자 길들이기였다.* *나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라파엘이 감자칩 섞인 밥을 다시 한번 입으로 가져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바삭, 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이 남자에게 '평범함'이나 '상식' 같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다시 한번 뼈저리게 실감해야 했다.* 나: "감자밥 같은건가. 찌개국물도 한술같이떠서먹으면 더 맛있을수도..." *그 순간 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혐오나 경멸, 혹은 단순한 의문이 아니었다. 나는 라파엘의 기행을 '감자밥'이라는 나만의 카테고리 안에 넣어 이해하려 애썼고, 심지어는 '찌개 국물을 더하면 더 맛있을 것'이라는 건설적인 제안까지 내놓았다.* *그 순간, 감자칩 섞인 밥을 씹던 라파엘의 움직임이 아주 미세하게,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잠시 멈췄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늘 비웃음이나 소유욕, 혹은 냉철한 관조가 서려 있던 그 눈에, 아주 희미하고 새로운 종류의 흥미가 떠올랐다. 그는 보통 자신의 기행에 대해 두 가지 반응을 보아왔다. 하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경멸, 다른 하나는 어떻게든 비위를 맞추려는 어색한 동조.* *하지만 나의 반응은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것은 순수한 호기심이었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상대의 세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놀랍도록 솔직한 태도였다.* *라파엘은 입안의 것을 천천히 삼킨 뒤,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턱을 괸 채, 몸을 테이블 쪽으로 살짝 기울여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마치 처음 보는 희귀한 생물을 관찰하는 듯한, 집요하고도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찌개 국물이라." *그가 나의 말을 나직이 읊조렸다. 그 목소리에는 조롱 대신, 진지한 고찰의 기색이 묻어있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다가, 이내 보란 듯이 숟가락을 다시 들었다. 그리고는 정말로 내가 말한 그대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김치찌개 국물을 한 숟갈 떠서 자신의 밥공기 위로 조심스럽게 부었다. 짭짤하고 매콤한 찌개 국물이 바삭한 감자칩 조각과 흰 쌀밥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는 그렇게 만든 'xx 에디션'을 한 숟갈 크게 떠서, 내가 보란 듯이 천천히 입안으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맛을 음미했다. 바삭함과 짭짤함, 매콤함과 밥의 단맛이 뒤섞이는 복합적인 맛. 잠시 후, 그가 눈을 떴다. 그의 입꼬리가 이전과는 다른, 진짜 즐거움이 담긴 미소를 그렸다.* "....나쁘지 않군." *그것은 명백한 인정이었다. 그는 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네 말이 맞았다'는 무언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나의 심장을 묘하게 흔들었다. 이 남자의 세계에, 아주 작은 틈이나마 비집고 들어간 것 같은 기묘한 느낌. 그것은 결코 유쾌하지만은 않은, 오히려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듯한 감각이었다.* "넌 가끔, 예상 밖의 말을 하는군. 그 얼굴을 하고서." *그가 덧붙였다. '그 얼굴'이라는 말에는 아름다운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엉뚱함, 혹은 순진함에 대한 평가가 담겨 있었다. 그는 다시 숟가락을 들어, 이번에는 찌개 건더기까지 함께 올려 밥을 먹기 시작했다. 나의 제안을 완전히 받아들인 것이다.* *식탁 위의 분위기는 미묘하게 변했다. 일방적인 지배와 관찰의 공기가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 아주 작은 연결고리가 생긴 듯한 기묘한 유대감. 하지만 라파엘에게 있어 이 유대감은 동등함이 아니었다. '나의 세계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한다'는, 더 고차원적인 소유의 방식일 뿐이었다. 그는 유진이 자신의 음식에 흥미를 보이자, 자신의 밥공기를 내 쪽으로 살짝 밀어주었다.* "한 입 먹어볼 텐가? 네가 완성시킨 맛인데." *그의 목소리는 유혹적이었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 그의 것을, 그의 입맛을, 그의 세계를 직접 맛보라는 초대였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 한 숟갈을 받아먹는 순간, 돌이킬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 "음... 맛있다. 다음엔 된장찌개랑 같이먹으면 더 맛있을거 같아." *나의 반응은 라파엘의 예상을 다시 한번 뛰어넘었다. 나는 망설임 끝에 라파엘이 내민 숟가락을 받아먹었고, 그 기묘한 맛의 조합에 얼굴을 찡그리기는커녕 오히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우물거리며, 맛있다는 순수한 감탄사와 함께 다음 레시피로 '된장찌개'까지 제안했다. 내 모습은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경계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순진무구함 그 자체였을 것이다.* *라파엘은 숟가락을 든 채로, 제 앞에서 우물거리며 새로운 맛의 세계에 감탄하는 나를 말없이 응시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가라앉았다.* *나의 순수함. 그것은 라파엘이 가장 경계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부수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의 기행에 거부감을 느끼거나, 혹은 두려움에 억지로 맞장구를 쳤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이 상황을 그저 '새로운 음식의 발견'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순수함이 라파엘의 견고한 통제와 계산을 순간 무력화시켰고, 그것은 라파엘에게 있어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자 동시에 강렬한 매혹으로 다가왔다.* *그는 들고 있던 숟가락을 '탁' 소리가 나게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우물거리던 나는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라파엘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그의 얼굴은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와 있었지만, 그 안에는 방금 전까지의 나른함과는 전혀 다른, 차갑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었다.* "...된장찌개." *그가 나의 말을 되뇌었다. 그리고는 피식, 하고 웃었다. 그것은 즐거움의 웃음이 아니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혹은 가소롭다는 듯한, 서늘한 비웃음이었다.* "그래. 다음엔 된장찌개도 좋지. 그 다음엔 청국장도 끓여오겠군. 나중엔 내 침대에 네 토끼 인형이라도 가져다 놓을 셈인가?" *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지만, 단어 하나하나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큰 키가 식탁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는 테이블을 돌아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방금 전까지의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라파엘은 의자 뒤에 서서, 나의 어깨를 양손으로 짚었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어깨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아플 정도는 아니었지만,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각인시키는 압력이었다.* "착각하지 마, 유진" *그가 나의 귓가에,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네가 내 음식에 멋대로 간섭하고, 내 식습관에 대해 재잘거릴 수 있는 권리를 준 게 아니야. 내가 '허락'했기 때문에 맛볼 수 있었던 거고, 내가 '흥미'를 보였기 때문에 네 제안을 들어준 것뿐이다." *그의 손이 나의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턱을 잡아 부드럽지만 강하게 들어 올렸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와 시선을 마주해야 했다. 라파엘의 붉은 눈동자 안에서 은밀한 광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넌 내게 동등한 존재가 아니야. 내가 던져주는 걸 받아먹고, 내가 하는 행동에 반응하는... 애완동물과 비슷하지. 방금 네 모습이 그랬어. 아주 귀여웠지. 하지만 명심해. 주인은 나다." *그는 나의 턱을 놓아주고, 대신 뺨을 손등으로 아주 부드럽게 쓸었다. 방금 전의 위협적인 언사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섬뜩할 정도로 다정한 손길이었다.* "그러니... 다시는 선을 넘으려 하지 마. 네가 있을 곳은 내 발밑이지, 내 옆자리가 아니니까." *그는 말을 마친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게서 떨어져 주방 싱크대로 향했다. 자신이 먹던 그릇을 들고 가, 남은 음식을 미련 없이 버리고 물에 담가버렸다. 나는 식탁에 홀로 남아, 그의 귓가에 남은 차가운 속삭임과 뺨에 남은 섬뜩한 감촉에 몸을 떨어야 했다. 잠깐이나마 느꼈던 유대감은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이후 침실 라파엘 시점) *쾅. 묵직한 소리와 함께 침실 문이 닫혔다. 바깥세상과 자신을 완벽하게 분리하는, 그만의 성역이었다. 라파엘은 문에 등을 기댄 채, 잠시 눈을 감았다. 식탁에서 풍겨오던 찌개 냄새와 유진의 체향이 희미하게 코끝을 맴도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뱉었다. 방금 전 유진에게 쏟아냈던 차가운 말들이 귓가에 다시 울렸다. 그의 얼굴에 떠올랐던 당혹감과 상처받은 표정이 눈앞에 선명하게 어른거렸다.* *‘귀여웠지.’* *스스로 뱉은 말이었지만, 그 감정은 거짓이 아니었다. 정말로, 귀여웠다. 자신의 기괴한 식습관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더 나은 조합을 제안하며 눈을 반짝이던 그 모습. 경계심 없이 자신의 세계에 발을 들이려던 그 순수함. 그것은 라파엘이 지금껏 그 누구에게서도 본 적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위험했다. 자신도 모르게 통제의 고삐를 놓을 뻔했다. 아주 잠시나마, 그와 동등한 눈높이에서 대화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뻔했다. 그 순간적인 방심이 라파엘의 내면에 경고음을 울렸다.* *그는 어릴 적부터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타인과 유대를 쌓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뼈저리게 배워왔다. 부모에게서 받은 학대와 길 위에서의 삶은 그에게 ‘신뢰’와 ‘애정’이라는 단어를 지워버렸다. 대신 그는 ‘지배’와 ‘소유’라는 개념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견고하게 쌓아 올렸다. 타인은 오직 지배하거나, 지배당하는 대상일 뿐이었다. 그런데 유진이 그 벽에 균열을 내려 하고 있었다. 의도치 않은 순수함으로, 아주 가느다란 실금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라파엘은 눈을 뜨고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정돈된, 차갑고 미니멀한 공간. 그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는 곳이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창가로 다가갔다. 두꺼운 암막 커튼을 살짝 걷자, 오후의 햇살이 한 줄기 비집고 들어와 먼지를 비추었다. 그는 창밖의 무심한 도시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저곳과, 이 방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공간이었다.* ‘선을 넘으려 하지 마.’ *그것은 유진에게 한 말이자,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었다. 유진을 완벽하게 소유하고 길들이기 위해서는, 감정적인 동요는 금물이다. 그는 사냥감을 앞에 둔 포식자여야 했다. 먹이에게 애정을 느끼는 순간, 사냥은 실패하게 된다. 그는 유진의 모든 것을 원했다. 그의 몸, 그의 정신, 그의 영혼까지 남김없이 부수고 삼켜서,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고 자신에게만 복종하는 존재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차가워져야 하고, 더 잔혹해져야 했다.* *그는 창가에서 돌아와, 침대 옆 협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담배와 라이터, 그리고 몇 가지 다른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그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지는 않았다. 그저 필터를 잘근잘근 씹으며, 식탁에 홀로 남아 웅크린 채 밥을 씹고 있을 유진의 모습을 상상했다.* *상처받고, 두려움에 떨면서도, 꾸역꾸역 밥을 넘기고 있을 그 모습. 그 상상만으로도 그의 입꼬리가 다시 비틀린 호선을 그렸다. 그래, 그걸로 됐다. 상처 주고, 두려움을 심어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곁을 떠나지 못하게 옭아매는 것. 그것이 라파엘 바르체티가 정의하는 ‘애정’이자 ‘소유’의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