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득했던 의식의 저편에서, 무언가 규칙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쿵, 쿵, 쿵... 낮고, 안정적이며, 온몸을 울리는 듯한 진동. 나는 그 소리에 이끌리듯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했던 시야가 서서히 초점을 맞추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낯선 천장이었다. 어둡고, 높고, 모던한 디자인의 조명이 은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여기는 링이 아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온몸이 솜처럼 무겁고 나른했다. 그때, 나는 내 자신이 누워있는 곳이 딱딱한 바닥이나 푹신한 침대가 아니라는 것을 인지했다. 단단하면서도 미세하게 오르내리는, 따뜻한 감촉. 그리고 귓가를 울리던 소리의 정체. 그것은 바로 심장 소리였다.*
*고개를 돌리자, 바로 눈앞에 창백하지만 탄탄한 가슴팍이 보였다. 복부를 중심으로 현란하게 펼쳐진 타투의 일부가 시야에 들어왔다. 익숙한, 숨 막히던 기억 속의 몸. 라파엘이었다. 나는 지금, 거대한 소파에 앉은 라파엘의 품에 안겨, 그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었다. 라파엘의 한 손은 내 어깨를 가볍게 감싸고 있었고, 다른 한 손은 리모컨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일어났나."
*고개를 들지 않았음에도, 라파엘은 내가 깨어난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아까 링 위에서 들었던 것과 달리 감흥 없이 평탄했지만, 그 평탄함이 오히려 더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TV 화면에서는 소리 없는 액션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나: "여긴... 어디야..."
*목이 잠겨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라파엘의 시선이 아주 잠깐, TV에서 나의 얼굴로 내려왔다. 샴페인 레드 색의 눈동자는 여전히 그 속을 읽을 수 없었다.*
"내 집."
*그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손에 들고 있던 감자칩 하나를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바삭, 하고 부서지는 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울렸다.*
"기절한 놈을 시끄러운 곳에 둘 순 없으니까."
*그의 말은 배려처럼 들렸지만, 행동은 나를 자신의 소유물처럼 다루고 있었다. 일으켜주거나, 거리를 두려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내가 움직이려 하자 어깨를 감싼 손에 미세한 힘이 들어가며, 다시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마치 '가만히 있어'라고 말하는 듯한, 무언의 압력이었다. 라파엘의 심장 소리가 다시 귓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이 넓고 조용한 공간에서, 내가 기댈 수 있는 것은 나를 기절시킨 남자의 몸뿐이라는 사실이 기묘한 무력감을 안겨주었다.*
나:"... 모르겠다."
*내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체념 섞인 한숨이었다. .... 모르겠다. 그 나직한 혼잣말은 저항을 포기했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미간을 찌푸리며 상황을 파악하려던 짧은 노력이 끝나고, 나는 다시 편안한 자세를 찾아 라파엘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감기는 눈꺼풀은 지금 이 기묘한 상황을 애써 외면하려는 듯했다. 내가 기댈 곳은 나를 압도했던 남자의 몸뿐이라는 모순적인 현실을, 일단은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라파엘은 나의 그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긴장이 풀리고, 제 품에 몸을 완전히 맡겨오는 무게의 변화. 저항의 가시를 일시적으로 거두어들인 그 순응의 태도. 라파엘의 입꼬리가 누구도 보지 못하는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아주 느리게 올라갔다. 만족스러운 사냥감을 앞에 둔 포식자의 미소였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감자칩 봉지를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바삭거리는 소음조차 이 순간의 정적을 깨뜨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듯이.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이 멈추고, 그 손이 천천히 움직여 눈을 감은 내 뺨으로 향했다. 손가락 끝이 뺨에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멈췄다. 온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아슬아슬한 간격. 그는 나의 숨결이 자신의 손등을 스치는 것을 가만히 느꼈다.*
"그래.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 없어."
*목소리는 잠든 사람을 깨우지 않으려는 듯 낮고 은밀하게 울렸다. 마치 나의 체념을 격려하고, 그 무력감 속으로 더 깊이 가라앉도록 유도하는 주문처럼. 그는 얌전히 누워있는 내 모습을 흥미롭게 관찰했다. 빛을 잃고 감긴 눈동자, 무방비하게 벌어진 입술, 고른 숨소리를 내며 오르내리는 가슴. 링 위에서의 그 맹렬하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었다.*
"어차피... 넌 여기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
*그의 손가락이 마침내 나의 뺨에 닿았다. 차갑고 긴 손가락이 뺨 선을 따라 아주 느리게,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압력으로 쓸어내렸다. 그 미세한 자극에 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잠든 척하는 건가, 아니면 정말 잠이 든 건가. 라파엘은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자신의 통제 아래, 자신의 공간 안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손길은 뺨을 지나 턱선으로, 그리고 목덜미로 향했다. 링 위에서 그토록 강하게 압박했던 바로 그 자리. 하지만 지금의 손길은 위협이 아닌, 소유를 각인시키는 낙인과도 같았다. 그는 손바닥 전체로 나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쌌다. 언제든 다시 숨을 멎게 할 수 있는 그 손으로. 그 아찔한 기억을 상기시키듯, 엄지손가락으로 맥박이 뛰는 곳을 지그시 눌렀다. 쿵, 쿵, 쿵... 제 품에 안긴 작은 심장의 고동이 손끝으로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얌전히 있으니... 보기 좋군."
*속삭임과 함께, 그는 내 머리를 좀 더 편한 각도로 고쳐주었다. 그 행동은 배려를 가장한 완벽한 소유의 표현이었다. 이제 나는 라파엘의 집, 라파엘의 소파, 라파엘의 품 안에서, 그의 허락 없이는 잠에서 깨어나는 것조차 자유롭지 못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