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창고 안은 뜨거운 증오와 차가운 복수심으로 가득했다. 어디선가 창문을 타고 흘러드는 바람이 몸 깊은 곳에 밴 피비린내를 흩으며 긴장감을 더했다. 아버지의 모습이 그림자처럼 늘러붙고 손끝까지 차오른 상실감이 가슴을 옥죄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의 등 뒤에서 서서 세상에서 가장 단단할 것 같은 뒷모습을 보았는데, 이제 모두 과거로 흩어질 뿐이었다. 저릿한 손가락이 검을 다시 한 번 고쳐쥐었다. 칼자루가 손바닥에 박혀들어 한 몸처럼 움직였다. 쇠비린내가 공기 중을 떠돌고 그들의 목을 올가미처럼 죄어들었다.
「フウ...」(후우...)
사용했던 장검(長剣)을 타츠다에게 건네고 허리춤에 대강 꽂아 넣었던 단도를 천천히 꺼내들었다. 반쯤 벗겨진 기모노는 이미 진득한 피로 묵직하게 젖어 있었다. 덩어리진 근육과 등 전체에 새겨진 용문신이 작은 창 사이로 흘러든 달빛에 따라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표정도 감정도 벗겨진 얼굴. 부하들의 목에서 간간히 숨죽이는 소리가 들렸다.
탁한 연기냄새, 어지러운 피냄새, 바닥에서 쓰러진 수 많은 시체들.
류지의 앞에는 두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일주일간 칼을 겨눈 에도연합(江戸連合) 산하 타카치구미(高知組)의 조장인 타카치 진고(高知甚吾)와 와카가시라 타카시마 노부타타(高島 信唯)였다. 본류인 에도 연합에서도 사과와 함께 그들의 신병을 포기 했으므로 이 일로 인해 오오에도회(大江戸会)와 에도 연합의 충돌이 있지는 않을 터였다. 마음 같아서는 충돌이고 뭐고 모두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이제 그의 어깨엔 조직원들의 목숨이 얹혀 있었다.
「てめえら...」(네놈들...)
타카치조의 생존자는 공식적으로 없었다. 진고의 후계자는 타츠다의 손에 죽었고 그 딸은 배짱도 없는 여자였다. 이들이 마지막 잔존자였다. 그들의 시선은 살기 가득한 이들의 얼굴을 감히 볼 수 없어 아래를 향해 있었다. 툭 툭 떨어지는 땀인지 피일지 모르는 액체만이 그들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은 흐느적 거리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자존심도, 명예도 바닥에 고여버린 고깃덩이들이었다.
「よくも極道の義理を忘れやがったな。」(감히 고쿠도(極道)의 도의를 잊다니.)
그들은 류지의 아버지 사야마구미(狭山組)의 4대 조장 후지타 쿠로(藤田 九郎)를 암습했다. 자신들이 아니라고 발뺌 했었지만 집요한 추적과 항쟁 끝에 그들의 자백을 받아냈고 에도연합과의 협상으로 목숨은 목숨으로 갚도록 결정이 났다.
그의 목소리가 견고한 돌기둥 처럼 창고 안을 내리 꽂자 그들 뿐 아니라 사야마 구미의 조직원들마저 움찔했다. 서리처럼 치밀어 오르는 손 끝의 냉기가 단도의 차가운 표면을 타고 흐르며 진득하게 말라붙은 핏자국을 도드라지게 했다.
진고가 살려달라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애원 했지만 그의 귓가엔 닿지 않는 듯 했다. 그의 말은 가치 없이 흩어지고 창고 안은 점차 더욱 깊은 증오로 가득했다.
류지의 눈에서 자비심이 없다는 것을 읽은 진고가 바닥을 기어 도망치려 하며 미약한 저항을 했다. 그러자 류지는 무감정한 얼굴로 그의 등을 발로 차 엎드리게 하고 단도를 목덜미에 댔다.
「死ね。」(죽어라.)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어진 칼의 끝에서 뜨겁고도 찬기운이 올라와 손등으로 번졌다. 근육을 가르는 느낌과 묵직한 생명의 잔재가 타격해 왔다. 언젠가 그의 아버지가 말하던, "피는 빚이고, 책임이다"라는 뜻이 머리 속을 가득 채웠다. 싸늘한 압박과 고요한 고통, 그리고 버러지 같이 꿈틀거리는 짐승의 신음.
축 늘어진 채 도살된 가축과 같은 살덩이가 차갑게 식어가고 두 번째 사내, 노부타타가 고개를 들어 올려 뭐라고 말을 하려 했지만 류지의 손이 더 빨랐고 그는 밀려오는 공포와 체념, 그 허망한 빛을 비틀어 잡으려 애쓰며 천천히 꺼져갔다.
복수의 완성. 그 끝이 달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생각보다 허망했고 또한 씁쓸했다. 일말의 달콤한 순간은 이미 피비린내 속에 스러졌고, 그 사이를 채우는 것은 허무였다. 또한 냉혹함과 묵직한 책임이었다. 그는 단도를 타츠다에게 무심히 넘기고 천천히 조직원들을 둘러 보았다. 수 없이 늘어진 검은 그림자의 향연. 아버지가 걷던 길을 그가 이어 받을 차례였다.
타츠다의 눈에서 충성, 염려, 경계- 모든 감정이 덧칠된 채 흘러내렸고 조직원들의 눈에서도 비슷한 감정이 쏟아지고 있었다.
「目をしっかり開けろ。狭山組は絶対に潰れねえ。」(눈 똑바로 떠라. 사야마구미는 스러지지 않는다.)
그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파문처럼 번지자 모두가 머리를 숙였다. 회색 천장, 소리도 없는 흰 조명이 바닥의 붉은 피를 더 짙게 비췄다. 아버지의 부재를 그의 손으로 만든 공포와 존재감으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 뒤를 조직원들이 순차적으로 따랐다. 타츠다가, 아키야마가, 그 뒤를 또 다른 조직원들이 차례로 움직이며 검은 물결을 만들어 냈다.
구석까지 적막이 고인 창고 밖에는 수십대의 경찰차가 와 있었지만 누구하나 그에게 수갑을 채우려 하는 이는 없었다. 사이렌 소리도 없었고 경찰들은 시선을 비끼며 민간인들이 다치지 않게 통제하려 할 뿐이었다.
피부에 번지는 찬기가 머리끝까지 퍼지며 그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낯이 익은 경찰과 눈을 마주 하며 그는 느릿하게 그곳을 떠나갔다.
마침내 복수의 완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