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아침 햇살이 커튼 틈 사이로 스며들어, 거실 바닥 위로 길고 고요하게 늘어졌다. 평화로운 하루의 시작이었다.
일곱 살 텐마는 갓 내려앉은 햇살의 온기가 남아 있는 마룻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빨간 장난감 자동차를 이리저리 굴리며 소리를 냈다.
아이의 상상 속 도로 위로 자동차가 달리는 소리와 함께,
부엌에서는 고소한 미소시루 냄새가 퍼졌다.
나지막한 콧노래가 어머니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식탁에 앉은 아버지는 펼쳐 든 신문 너머로 장난치는 아들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는 이따금 손을 뻗어 텐마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헝클었고, 텐마는 까르르 웃으며 아버지의 손길에 머리를 비비듯 기대었다.
세상 모든 평온과 온기가, 이 작은 집 안에 오롯이 담긴 듯했다.
부모는 텐마에게 세상의 전부였고, 집은 그 자체로 작고 견고한 우주였다.
사랑과 보살핌이 넘치는 공간 속에서, 아이는 세상의 어두운 그림자 따위는 알지 못한 채 천진하게 자라났다.
그러나 그 작고 따뜻한 천국은, 너무나도 쉽게, 믿기 어려울 만큼 허무하게 무너져내릴 운명이었다.
그날 오후, 텐마가 유치원 버스에서 내렸을 때, 동네는 여느 때처럼 조용했다.
아이가 잘 아는 풍경, 변함없는 일상의 골목.
하지만 집 앞에 다다른 순간, 텐마는 어딘가 이상함을 느꼈다.
늘 굳게 닫혀 있던 현관문이,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어설프게 열려 있었다.
문지방 옆 신발장에는 아침에 본 그대로, 엄마와 아빠의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변한 건 없었다. 그런데도, 모든 것이 낯설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문을 밀어젖히며 아이는 조심스레 집 안으로 들어섰다.
돌아오는 건 아무런 대답도 없는, 숨 막히도록 차가운 정적이었다.
아침의 따스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거실은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었다.
부엌에는 식지 않은 국과 밥이 식탁 위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누군가 급히 자리를 떠난 듯, 혹은 아주 갑작스럽게.
불길한 예감이 작고 여린 심장을 거세게 두드렸다.
쿵, 쿵, 쿵. 귀 속에서 울려 퍼지는 건 자신의 심장 소리인지,
아니면 어디선가 다가오는 무언가의 발소리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았다.
아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부모를 불렀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대신 텅 빈 집 안을 가득 채운 건, 돌아올 줄 모르는 고요와 메아리뿐이었다.
어둠이 서서히 깔리기 시작했다.
창밖은 이미 검푸른 빛으로 물들었고, 실내에는 길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작은 형체 하나가 거실 구석에 웅크린 채, 곰인형을 품에 안고 조용히 몸을 떨고 있었다. 들썩이는 어깨 위로 흐느낌이 번졌고, 이윽고 억눌린 울음이 터져 나왔다.
부드러운 털에 얼굴을 묻은 채, 그 작은 존재는 밤이 깊도록 조용히 무너져내렸다.
그가 믿고 의지하던 세계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차가운 어둠 속에서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그때였다. 굳게 닫혀 있던 현관문이 거칠게 열렸다.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낯익은 실루엣이 어둠을 가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아마야구미의 보스, 사에키 레이지. 굳어진 얼굴, 싸늘한 눈빛.
그 뒤로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무표정한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작은 몸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놀람도, 말도, 움직임도 사라진 채 그저 눈물만이 조용히 흐를 뿐이었다.
목이 메어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레이지는 말없이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었다.
차가운 분노와 눌러 담은 슬픔, 그리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비장한 결심.
그 표정은 낯설었지만, 어딘가 마음 깊은 곳에 오래전부터 각인되어 있던 듯한 기묘한 익숙함을 불러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차갑고 단호한 손길이었다.
그 손은 작디작은 손을 감쌌고, 저항은 없었다.
아니,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무너진 집을 등지고, 그 작은 그림자는 조용히 남자의 곁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차 안은 침묵으로 가득했다. 작은 눈동자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익숙한 거리, 익숙한 간판, 언제나처럼 붉은 지붕 위로 날아가는 비둘기 떼—모든 것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엄마랑 아빠는… 언제 돌아올까.’ 막연한 희망이었다.
어린 마음은 믿고 싶었다. 곧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운전석에 앉은 남자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말 한번 하지 않았고, 라디오도 켜지지 않았다.
그저 끝없이 이어지는 길 위로, 조용한 엔진 소리만 깔려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차가 멈춰 선 곳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장소였다.
높은 담장을 두른 대저택. 정갈한 일본식 정원이 펼쳐져 있고, 흙길을 밟는 발소리가 작게 울렸다.
남자는 아이를 조심스레 품에 안고 차에서 내렸다.
무표정한 얼굴, 조용한 동작.
거대한 저택의 문이 열리자, 또 다른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화려하면서도 숨 막히는 공간. 벽지마저 고요했고, 공기에는 어떤 설명할 수 없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작은 몸은 그 공간의 위압감에 눌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 - 그날 밤, 잠은 오지 않았다.
낯선 침대, 낯선 천장, 낯선 냄새. 머릿속은 물음표로 가득했다.
‘엄마는… 아빠는…’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는 어둠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때, 조용히 방문이 열렸다.
남자가 들어와, 말없이 침대 곁에 앉았다.
작은 손을 조심스레 감싸쥔 그의 손은, 놀라울 만큼 크고 따뜻했다.
하지만 아이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찬바람이 불었다.
이제는 어디가 집인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세상은 여전히 돌고 있었지만, 그 중심이 사라져버린 느낌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레이지는 텐마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의 말은 텐마의 작은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다.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지킨다는 말은 또 무엇일까?
그는 레이지를 올려다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레이지는 텐마를 품에 안고 등을 토닥였다.
그의 품은 따뜻했지만, 텐마의 마음속에는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아이는 낯선 남자의 품에 안겨 소리 없이 흐느꼈다.
그날 밤, 그 작은 마음 속에서는 행복했던 유년기가 끝났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그리고 자신의 삶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시간은 조용히 흘렀다. 계절이 몇 번이고 바뀌는 동안, 텐마는 그 집에서 자랐다.
마당의 모래 위에 발자국을 남기고 밤이면 홀로 눈물 흘리던 꼬마는, 이제 목검을 들고 정자 앞에 묵묵히 서는 소년이 되었다.
사에키 레이지는 텐마에게 모든 것을 가르쳤다.
학교를 다니게 했고 무술과 전략, 그리고 사람을 다루는 법까지.
그는 텐마를 자신의 후계자처럼 길렀다.
겉으로는 따뜻한 보호자였지만, 그 눈빛에는 언제나 차가운 각오가 깃들어 있었다.
아이의 내면에는, 여전히 부모를 잃은 그날의 공허가 텅 빈 방처럼 남아 있었다.
레이지의 품은 따뜻했지만, 그 따뜻함은 언제나 조금 늦게 닿았다.
무언가를 지켜내지 못한 어른의 죄책감, 모든 걸 알려주면서도 끝끝내 말하지 않는 진실이 어린 텐마의 가슴에 천천히, 그러나 깊게 스며들었다.
때때로 그는 혼자서 밤을 지새웠다.
불이 꺼진 복도 끝에서 부모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헛된 망상을 품기도 했고, 훈련 도중 숨을 몰아쉬며, ‘내가 더 강해진다면…’ 하고 입술을 깨물기도 했다.
아이는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성장은 단지 키가 크고, 힘이 붙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건 어쩌면— 울음을 삼키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고, 마음속 빈자리를 감추는 법을 익히는 것이었다.
그렇게 텐마는 레이지의 아들로, 그리고 언젠가 그의 오른팔이자 그림자가 될 존재로 자라났다.
사랑과 고통, 보호와 책임이 얽힌 복잡한 감정의 실타래 속에서.
세상에 등을 진 채, 조용히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