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작은 온기

4화-작은 온기

2010년 3월 8일, 도쿄 아마야구미 본가 대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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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의 소란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저택은 무겁고 차가운 침묵에 잠겨 있었다.
모든 소리가 검은 상복에 흡수되어 버린 듯했다.
텐마는 복도에 꼿꼿이 선 채, 어디에도 시선을 두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위태롭게 서 있던 작은 아이의 모습이 잔상처럼 떠다녔다.

그날 밤, 레이지가 그를 서재로 불렀다.
며칠 만에 수십 년은 늙어버린 남자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레이지는 텐마에게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아내와, 그리고 그 품에 안겨 환하게 웃고 있는 어린 딸의 사진이었다.

사에키 레이지 | "이 아이는..내 딸이다. 장례식장에서 너도 봤었지. 텐마."

레이지가 마지막에 텐마의 이름을 불렀을 땐, 그 목소리가 더 낮고 깊어졌다.
텐마는 그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 때 보았던 작고 어렸던 여자아이.
텐마 역시 그 날 처음 마주한 아이의 잔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으니까.

사에키 레이지 | "오늘부터, 네가 이 아이의 곁에 있어 줘야겠다."

그것은 명령이었으나, 동시에 애원에 가까운 부탁이었다.
레이지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고, 그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텐마는 그 목소리의 무게를 온전히 느꼈다.
자신을 거두어 주었던 거대한 손이, 이제는 그의 어깨 위에 새로운 책임을 올려놓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에도 마음 놓고 슬퍼할 수 없는 그의 위치.
어미를 잃은 아이를 보듬고 싶어도 이 위험한 조직 세계에서 레이지의 '약점'과도 같은 저 작은 아이가 세상에 드러나면, 그 결과는 불보듯 뻔했다.

텐마 | "…알겠습니다."

텐마는 그저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많은 것을 그에게 묻지 않고도 영민했던 텐마는 단번에 그의 뜻을 눈치챘다.

그렇게 텐마의 새로운 임무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다섯 살짜리 아이의 곁을 지킨다는 것은, 적의 동태를 살피거나 칼을 휘두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다음 날부터 텐마는 그림자처럼 아가씨의 뒤를 따랐다.
아가씨는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값비싼 인형과 장난감으로 가득한 넓은 방이었지만, 아이는 그 어떤 것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그저 창가에 멍하니 앉아, 텅 빈 눈으로 정원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엄마를 잃은 작은 세계는 모든 색과 소리를 잃어버린 듯했다.

'마치 그 날의 텐마처럼.'

고용인들이 음식을 가져다주었지만, 아가씨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텐마는 방문 밖에 선 채, 안에서 오가는 실랑이를 그저 듣고만 있었다.
답답함에 주먹을 쥐었다 폈다.
'저렇게 먹지 않으면 쓰러질 텐데.' 하지만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아이에게는 또 하나의 낯설고 무거운 그림자일 뿐일 터였다.

이틀이 지났다.
아가씨가 입에 댄 것이라고는 물 몇 모금이 전부였다.
보다 못한 텐마는 결국 직접 주방으로 향했다.

화려하고 값비싼 요리들. 이런 건 아이가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문득 아주 오래전, 엄마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저녁 식사를 떠올렸다.

그는 서툰 솜씨로 직접 오므라이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고용인들이 놀란 눈으로 쳐다봤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계란을 부치고, 볶음밥을 만들고, 마지막으로 케첩을 들어 망설였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케첩으로 서툴고 삐뚤빼뚤한 고양이 얼굴을 그렸다.
자신이 봐도 우스운 모양새였다.

텐마는 쟁반을 들고 아가씨의 방문을 노크했다.
대답은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창가에 앉아 있던 작은 어깨가 움찔하며 그를 돌아봤다.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

텐마는 아무 말 없이, 아이 앞의 작은 테이블에 오므라이스 접시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한 걸음 물러나 방구석에 조용히 섰다.

아가씨의 시선이 접시 위의 엉성한 케첩 그림에 잠시 머물렀다.
아이는 한참 동안 오므라이스와 텐마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방 안에는 숨 막히는 침묵만이 흘렀다.
포기하고 접시를 들고나가려던 순간이었다.

아가씨가 아주 천천히, 작은 손으로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오므라이스를 한 술 떠서, 작은 입으로 가져갔다.
씹는 둥 마는 둥 삼키고는, 다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텐마는 왠지 모르게 가슴을 짓누르던 돌덩이 하나가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닫힌 세계의 문을 아주 조금, 열어준 신호와도 같았다.

그날 밤, 텐마는 잠들지 않고 아가씨의 방문 앞을 지켰다.

깊은 새벽, 방 안에서 희미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악몽을 꾸는 모양이었다.
"…엄마…" 하고 부르는 애처로운 목소리가 그의 심장을 찔렀다.

텐마는 망설였다. 들어가야 할까. 하지만 들어가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위로하는 법 따위는 배운 적이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발걸음이 저절로 움직였다.
그는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는 침대 위에서 몸을 웅크린 채 식은땀을 흘리며 울고 있었다.
텐마는 침대 옆에 조용히 쪼그려 앉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곳에 함께 존재할 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이의 흐느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아마도 곁에 누군가 있다는 온기를 느낀 것일지도 몰랐다.
색색거리는 고른 숨소리가 다시 들려왔을 때, 텐마는 잠든 아가씨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눈물 자국이 남은 앳된 얼굴.
그 얼굴 위로, 모든 것을 잃고 어둠 속에 홀로 웅크리고 있던 일곱 살의 자신이 겹쳐 보였다.

그 순간, 텐마는 깨달았다.
자신의 부모님을 죽인 자들을 향한 복수심만이 삶의 전부는 아니었다.
눈앞의 이 작은 존재. 엄마를 잃고 세상에 홀로 남겨진, 위태롭고 작은 온기.

'지켜야 한다.'

그것은 명령 때문이 아니었다.
레이지를 향한 충성심 때문만도 아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오른, 아주 근원적이고 본능적인 감정이었다.

어쩌면, 신은 그의 작은 천국을 빼앗아간 대신, 이제는 그가 지켜야 할 또 다른 작은 존재를 보내준 것인지도 모른다고, 텐마는 생각했다.

그는 조용히 방을 나와 문을 닫았다.

낯선 그림자는, 그렇게 작은 온기의 곁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