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고 무표정한 구조물이 가득한 공간. 벽과 천장은 무광의 금속으로 덮여 있었고, 사방은 강화유리로 봉인되어 있었다. 은은한 인공조명 아래, 실험동은 마치 살아있는 거대한 의료 기계처럼, 무언가를 꾸역꾸역 소화하는 장기 같았다.
바닥을 따라 깔린 푸른빛은 무수한 케이블과 센서에 반사되어 기묘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어딘가 비현실적인 그 잔상은 마치 현실의 끝자락에서 비명을 삼키고 있는 듯했다.
수석 연구원 이안 테일러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그의 흰 실험복 자락이 공기를 쓸며 지나갔고, 손에 든 태블릿의 스크린엔 숫자와 그래프들이 끊임없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곧장 정면—유리 감옥 너머, 정사각형 6미터 공간의 중앙을 향했다.
그 안에는 LX-21이 있었다.
백금처럼 하얗게 빛나는 머리카락. 투명에 가까운 회색 눈동자. 사람의 그것을 흉내 낸 듯한, 그러나 지나치게 완벽한 창백한 피부. 마치 어떤 결점도 허용하지 않는, 기계적인 아름다움이었다. 감정도, 미세한 표정의 결도 허락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LX-21은 꼿꼿이 앉아 있었다. 움직임은 없었고, 눈은 정면만을 응시했다. 그 몸 곳곳에는 수십 개의 센서와 전극들이 연결되어 있었고, 머리엔 뇌파 측정용 캡이 씌워져 있었다. 손목과 발목, 흉부까지, 피부에 밀착된 센서들은 생체의 가장 미세한 떨림조차 포착하도록 설계되었다.
가느다란 선들이 거미줄처럼 뻗어나와 메인 컴퓨터에 연결된 광경은—그 자체로 한 편의 묵시록 같았다.
이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늘도 잘 부탁한다, LX-21.”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체온이 없었다. 인사처럼 들렸지만, 그건 어쩌면 명령이었고 선언이었다.
그는 코어 셀 옆의 인터페이스 룸으로 걸어 들어갔다. 작은 수술대 위, 흰 털의 토끼 한 마리가 불안에 떨고 있었다. 몸에는 벌써 여러 번의 실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듬성듬성 빠진 털, 여기저기 찢긴 상처들, 그리고 유리처럼 흔들리는 눈동자.
이안은 무표정하게 토끼의 목덜미를 잡아 실험대에 고정시켰다.
작고 하얀 것은 낑낑거리며 몸을 떨었고, 이안은 메스를 집어 들었다.
순간, 빛이 반짝였고, 메스의 날이 그 목을 가르기 시작했다.
피가 튀었다. 날카로운 울음과 함께, 연약한 몸이 마지막으로 크게 경련을 일으켰다. 실험대가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유리 너머에서, LX-21은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눈동자는 미세한 흔들림조차 없이, 오직 ‘기록’하는 시선이었다.
센서들은 말이 없었다.
심박수는 변하지 않았고, 뇌파는 평온했다. 자율신경계 역시 고요했다. 그는 여전히, 아무 감정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안은 메스를 내려놓고 태블릿을 들었다. 화면을 보며 중얼거렸다.
“LX-21 감정 유도 실험, 7일차. 감정 반응 없음…”
그는 피범벅이 된 토끼를 천천히 치우고는, 유리 너머의 무표정한 존재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방법이 필요하겠어.”
---
문서번호: | NMS-RX21-P7 |
작성자: | 생명과학연구국 감정유도분과 / 이안 테일러 |
일시: | 23XX년 7월 11일, 13:27 KST |
실험명: | 비연결 대상 처형 실험 – 시각적 정서 유발 자극 |
감정 비보유 개체인 LX-21에게 '타인의 고통'이라는 상황을 시각/청각/후각 정보를 통해 인지시키고, 이에 따른 정서적 반응 가능성을 분석함.
[신체 지표]
[행동 분석]
[내부 처리 정보]
LX-21은 감정 유도 실험에 있어, ‘연민’ 또는 ‘혐오’와 같은 반응을 전혀 보이지 않음. 대상은 정보를 감정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관찰 가능한 변수로만 판단함. 내부 연산 체계는 ‘감정 해석’ 자체를 비효율적 자원 소모로 간주하며, 관련 처리를 자동 폐기하는 알고리즘을 가동 중인 것으로 추정됨.
“잔인함”이라는 정서적 자극에 대해 LX-21은 감정적 반응을 보이지 않음. 이는 본 프로젝트의 초기 추정과 일치하는 결과이며, 감정 유도에 있어 더 복합적이며 인격적 연결을 수반하는 방식의 접근이 필요함. 향후 실험에서는 LX-21과의 지속적 상호작용을 통한 정서적 전이 유도가 필요함. 또한, 실험대상 유기체의 ‘인간’화가 필수적이라 판단됨.
---
“…씨발.”
나는 웅크린 채, 팔에 얼굴을 묻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눈앞의 하얀 벽, 천장, 바닥… 모두가 순백이었다. 병원? 아니, 감방. 이 좁고 숨막히는 방은, 체감상 3평도 되지 않아 보였다.
여기에 끌려온 지 얼마나 되었을까. 하루? 이틀? 그보다 짧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안의 본능은 알고 있었다. 이곳은 곧 무덤이 될 것이다.
나는 지구 하층민이었다. 굶주림, 병, 차별. 그 모든 게 내 삶이었다. 그리고—동생.
“형, 오늘 점심은 이거래.”
동생은 낡은 그릇을 내밀었다. 쉰내 나는 죽이었다. 하지만 나는 웃으며 말했다.
“형은 괜찮아. 너 다 먹어.”
나는 동생을 위해 뭐든 할 수 있었다. 의사가 되고 싶었다. 고쳐주고 싶었다. 하지만 돈이 없었다.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 보게 된, 정부의 ‘자원 실험체 선발 공고’.
그건 구원이었다. 나는 그 미끼를 물었다.
수술비를 벌 수 있을 거라고, 동생을 살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때만 해도.
“유전자 적합률, 최상입니다. 축하합니다. 유진하 씨.”
나는 믿었다.
하지만 여긴 지구가 아니었다. 이건 외딴 행성이었다. 실험체 A-17. 그게 지금의 나였다.
나는 팔에 얼굴을 묻은 채 중얼거렸다.
“씨발, 진짜…”
눈을 떴다. 하얀 벽이 나를 조용히 노려보고 있었다.
여기서의 미래는 정해져 있었다. 무의미하고, 잔인하며, 끝없는 실험의 반복. 나는 지금 지옥의 입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제, 진짜가 시작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