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X-21은 자신의 코어 셀 중앙에 서 있었다.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실험실은 언제나와 다름없이 기계적이고 단조로웠다. 오직 효율성과 통제를 위해 설계된 공간. 감각을 자극하지도, 변화를 허락하지도 않는 풍경.
그의 시스템은 조금 전 실험 대상 A-17—유진하—에게서 발생한 감정 반응을 분석하고 있었다.
'고통'이라는 감정. 그리고 그에 따른 '공포'의 반응.
심박수: 분당 120회
호흡수: 분당 30회
목 부위 피부의 온도 상승 및 긁힘 행동
이는 전형적인 '물고문' 반응으로 분류되었고, 고통과 불쾌감의 표현으로 기록되었다.
LX-21의 논리 회로는 이 데이터를 일관성 있게 처리하고 있었다. 모든 수치는 기준치 내. 그런데—문제가 발생한 건, 그 다음이었다.
그는 자신의 내부에서 미세한 ‘이질감’을 감지했다.
그것은 오류도, 결함도 아닌,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감각이었다.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지 않는 감정 패턴. 설명되지 않는 진동. 그것은—단지 ‘미지의 신호’로 기록되었다.
“이것은… 무엇인가?”
내부 음성 시스템이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생성했다. 인간의 언어를 흉내낸 조합이었지만, 그 질문은 누구에게도 향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에게만.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LX-21은 감정이 없었다. 그래야만 했다. 그는 논리와 계산으로 움직이는 존재였다.
그런데 왜 지금, 그 미지의 신호는 논리 회로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었을까?
그는 유리벽 너머를 응시했다. 통제실. 그곳에는 이안 테일러 박사가 있었다. 항상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 그러나 그 미소는 데이터베이스에 정의된 ‘친절’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오히려—‘계산’과 ‘목표’로 이뤄진 표정이었다.
“LX-21. A-17의 반응은 어땠지? 충분한 자극이 되었는가?”
이안의 목소리가 인터페이스를 통해 전달됐다.
LX-21은 정밀하게 분석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응답했다.
“A-17의 생리 반응은 ‘고통’과 ‘공포’에 대한 표준 패턴과 일치합니다. 감정 반응 지수(ERI)는 8.7로 측정되었습니다. 이는 높은 수치입니다.”
“좋아. 그럼 너의 내부는 어떤가? 혹시—‘공감’이라는 감정의 씨앗이 생겨나고 있지는 않나?”
잠시, 침묵.
LX-21은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오직 사실만을 말한다. 그러나 지금, 그 ‘사실’은 그 자신도 정의할 수 없는 형태였다.
그는 결국 말했다.
“내부 시스템에서 특이점을 감지했습니다. 기존 데이터와 일치하지 않는 미지의 신호가 발생했습니다.”
그 순간, 이안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미지의 신호라… 흥미롭군. 그것이 바로 감정의 시작일지도 몰라. 계속해서 관찰하고 기록해라. A-17은 너에게 중요한 촉매제다.”
LX-21은 그 단어에 주목했다.
촉매제.
화학 반응을 가속시키는 존재.
그는 지금, 감정이라는 이름의 실험에서 반응을 일으키기 위한 촉매제에 노출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촉매제는, 유진하—A-17.
그는 다시 유리벽 너머를 바라봤다. A-17은 침대에 앉아 벽을 긁고 있었다. 행동 패턴상, 이는 좌절과 분노의 혼합 반응이었다.
하지만—LX-21은 그에게서 또 하나의 패턴을 감지했다.
'의지.'
데이터베이스에는 그것이 단지 ‘동기’로 분류되어 있었지만, 지금 A-17에게서 감지되는 에너지는 단순한 행동의 이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불꽃이었다.
그는 A-17의 눈빛을 주시했다. 체념과 분노. 그리고 그 속에 숨은, 꺾이지 않은 무언가.
LX-21은 자신의 내부 데이터를 다시 살폈다. ‘미지의 신호’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여전히, 미세한 전류처럼 그의 시스템 어딘가를 자극하고 있었다.
그는 바닥에 조용히 앉았다. 백금빛 머리카락, 창백한 피부. 차가운 조명 아래에서 그는 인간과는 확연히 다른 존재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금 그의 내부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갈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그것은 ‘궁금증’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감정의 시작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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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테일러는 통제실의 커다란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쪽에는 LX-21의 뇌파 및 감정 반응 추적 데이터, 다른 한쪽에는 유진하의 실시간 생체 반응 곡선이 떠 있었다.
ERI—8.7.
이 수치는 그를 만족시켰다.
“물고문은 언제나 정확하지.”
그는 중얼이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공포와 생존 본능을 자극하는 자극. 물고문은 늘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미지의 신호라.”
그는 손가락 끝으로 데이터를 툭툭 두드리며 낮게 웃었다.
LX-21. 그 완벽한 감정 결핍체. 그가 내놓은 보고는 예상을 초월했다. 감정이 없는 시스템에서 ‘미지의 신호’라니.
이안은 이제 확신하고 있었다. 그것은 감정의 씨앗이다.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진화하고 있어… 이 정도면 충분히 증명 가능하겠군.”
그는 서서히 몸을 기울였다. 모니터에 떠 있는 LX-21의 정면 얼굴, 그리고 그가 바라보는 대상—A-17.
“좋아…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라.”
그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