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아버지의 부름에 서재로 간 그는 다다미 위에 무릎을 꿇고 앉자마자 아버지의 차가운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시가를 물고 있던 아버지는 그가 들어서자 천천히 시가를 내려놓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짙은 담배 연기, 날 선 눈동자, 느슨하게 늘어진 채 툭툭 다다미를 두드리는 손가락. 모두가 부정적인 표시였다.
「お前、自分が後継者だって自覚あるのか?いつまで母ちゃんが死んだって泣きわめくつもりだ?」
(너. 후계자라는 자각이 있는 거냐. 언제까지 엄마가 죽었다고 질질 짜고 있을 거냐.)
공감은 하지 못할망정 나오는 말은 그런 것이었다. 울고 싶은 마음과 분노가 얽혀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미성숙한 아이의 울음을 삼키듯, 그는 헐떡이는 숨을 숨기며 서재를 나섰다. 병풍의 뒤에 숨어 있었는지 나오자마자 들리는 여자의 목소리에 그는 멈칫했다.
「アキラは思ったより未熟ですね。もっと厳しく教えないと。 家が潰れないためには、後継ぎがしっかりしてないと。」
(아키라는 생각보다 미성숙하네요. 더 단단히 가르치셔야겠어요. 집이 망하지 않으려면 후계가 튼튼해야죠.)
「今日はそこまでにしとけ。言っておいたんだから、時間が解決するだろう…」
(오늘은 그냥 둬. 말해뒀으니, 시간이 해결하겠지….)
아버지의 깊은 한숨이 다시 뒤를 이었다. 그는 이를 더욱 세게 악물었다. 어머니가 남긴 자리에 기어들어 온 이방인들의 입김이 점점 집 안 구석구석을 침범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뜬눈으로 지새운 밤, 새벽의 공기는 차가웠다. 집안 복조는 쥐 죽은 듯 고요했고, 그는 아직 다 사라지지 않은 밤의 어둠 속을 걸었다. 발걸음이 닿을 때마다 느껴지는 나무 바닥의 미세한 진동과 냉기가 몸을 타고 울렸고 부쓰마(仏間, 불단 있는 방)에서 풍겨오는 향이 코끝을 맴돌다 사라졌다. 어딘지 빛이 바랜 듯한 그 풍경 앞에 멈춰서서, 그는 질문을 그 안으로 던졌다.
나는 왜 살아 있는가. 왜 여기 있어야 하는가.
아버지는 여전히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다. 늘 고요하게 정돈되어 있던 정원이 나날이 황폐해져 가는 것도 모른 채. 돌봄 없이 방치된 식물처럼 말라비틀어진 웃음이 집안을 울렸다. 화려한 사안화같은 붉은 기모노가 집안을 빙빙 돌았고 어린 레이가 종종 그 뒤를 쫓으며 울고 웃었다. 아이의 짤랑이는 웃음소리든 찢어지는 종잇장 같은 울음소리든 이 집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먼발치에서 모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가끔 회의실에는 사야마구미의 타츠다 쇼에이나 사업을 돕던 간부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곤 했다. 그들은 아키라 앞에서 명확한 동정을 보내지도, 어설픈 위로를 건네지도 않았다. 탐색하려 하는 시선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는지 후계자 수업을 명분 삼아 참석하여 뒤쪽에 앉아 있는 그를 넌지시 바라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담담한 척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회의가 끝이 나고 간부진이 돌아가고 나면 그는 그날에 있었던 일들을 기록하곤 했다. 언젠가 이 모든 것들이 그에게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며. 괜찮다고, 다 이렇게 사는 것으로 생각하긴 했지만, 그 모든 일이 가혹하게 느껴질 때가 부쩍 잦았다. 어머니가 언젠가 엮어준 실팔찌를 손에 감고 다닌 것은 이 무렵의 일이었다.
견디는 것도, 버티는 것도 당신이라면 충분합니다.
어머니가 하셨던 말씀처럼, 그는 견디고 버텼다. 하지만 사토코와의 시간은 도무지 출구 없는 끝없는 미로를 헤매는 것 같은 질식감을 주곤 했다.
식사 시간에 유난히 화려한 그릇들과 생색을 내는 음식으로 식탁을 채운 사토코는 자연스럽게 자애로운 어머니인 척 그를 챙기는 흉내를 냈다.
「アキラ、味はどうだ?」
(아키라, 맛이 어떤가요?)
「…大丈夫です。」
(...괜찮습니다.)
체할 것 같은 말에 침묵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눈치 때문에 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침묵 끝에 대답하자 그녀는 슬픈 듯 말했다.
「アキラの口には合わないみたいだな…せっかく覚えたのに…」
(아키라의 입에 맞지 않나보네요... 애써 배웠는데...)
「お母ちゃん、レイはおいしいよ。」
(옴마, 레이는 마싯쪄요.)
그녀를 위로하듯 구는 레이의 목소리가 뒤따르며 그를 억압했다. 아이가 뭘 알겠느냐고 속으로 되뇌어도 레이가 그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는 얼굴을 보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제 어미처럼 요사스러운 아이의 모습, 가증스럽게 우는 척 기모노 소매로 눈가를 꾹 누르는 사토코의 모습, 그 모든 것을 보면서도 빙글빙글 웃고만 있는 아버지.
젓가락을 쥔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식탁 아래로 숨기며 그저 침묵하는 수밖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버지는 늘 그렇듯 식사를 마치자마자 자리를 떴고, 아이는 제 어미와 함께 아버지를 뒤따랐다. 모두가 떠난 식당에서 그는 가만히 눈을 감고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었다. 뭍에 올라온 물고기처럼 갑갑한 숨이었다.
밤이면 어김없이 어머니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잠이 드는 것이 두려웠다. 잠에 들었다가 다시 깨어났을 때, 어쩌면 모든 게 꿈이었길 바라는 희망이 들었지만, 점차 옅어져 가고 있었다. 다시 잠들기 싫어 부쓰마로 향하던 중 들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발걸음을 멈추고, 그림자에 숨어들자 선명히 들리는 목소리는 사토코의 것이었다.
「あの子、思ったより鈍いみたいだね。大人しいけど、それが良いのか悪いのか分からない。とにかく後継ぎがあの子だから…」
(애가 생각보다 둔한 것 같아요. 조용하긴 한데,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후계가 그 애라서….)
「それでも私が女将だ。あの子に何ができるっていうんだ。」
(그래도 제가 안주인이에요. 그 애가 뭘 할 수 있겠어요.)
「いつか仏間からあの女を追い出してやる。そのうちこの家も俺のものになるだろう…」
(언젠가 부쓰마에서 그년을 치워 버릴 거예요. 언젠가는 이 집도 제 것이 되겠죠….)
「その話はもうやめろ。親分がちゃんとやるから。口を閉じてろ。」
(그 건은 그만 말해요. 오야붕께서 알아서 하실 거예요. 입 다물고 계세요.)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듯 숨죽여 말하는 목소리가 음험했다. 그녀가 말하는 그년이 누굴 말하는지는 명약관화했다. 머리가 멍했다. 어머니 생전에도 그렇게 괴롭히더니, 분노가 순간적으로 끓어올랐다. 그녀가 통화를 마치고 사라지는 동안 어두운 복도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천천히 방으로 돌아가서 어느새 서늘하게 식은 이불 속에서 어머니가 남긴 실팔찌를 손에 꽉 쥐었다.
오직 완벽한 후계자가 되는 것만이, 이 모든 상흔에 대한 보복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워싼 어둠과 침묵 속, 그는 깊은 결의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