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장의 소란은 어느새 과거가 되었고 어머니가 떠난 집 안에는 비어 있는 방들의 적막만이 남았다. 아키라는 창밖으로 길게 볕이 누운 마루에 멍하니 앉아 어머니께서 생전에 가꾸어 놓은 후원을 바라보며 기억의 잔향을 맡았다.
퉁...
소즈(添水, 긴 대나무 원통모양 정원 장치)에 물이 가득 찼다가 그 안의 것들을 와라락 쏟아내며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소리가 아련하게 흘렀다. 가진 자들의 말뿐인 조문, 위로는 하나도 남지 않은 사당에서 그는 홀로 오랫동안 어머니의 기억을 애써 붙잡고 있었다. 늘 단정하고 기품 있던 어머니. 다정하진 않아도 세상 누구보다 그를 응원하고 사랑해 주시던 어머니의 부재는 그에게 진한 상실을 안겨주고 있었다.
- 쓰러지면 일어나면 되는 거예요. 세상은 당신의 상처를 궁금해하지 않아요.
- 남들 앞에서 약한 모습은 보이지 마세요. 견디는 것도, 버티는 것도 당신이라면 충분합니다.
남들이 들으면 그저 질책하는 것처럼 보일 말이었지만 엄격하고 품위 있는 안주인으로서 아들을 향한 건조한 격려이고 기대와 다독임이 섞여 있는 말이었다. 그는 그것을 충분히 알았기 때문에 언제나 어머니의 기대를 지지대 삼아 버틸 수 있었다.
- 아키라, 당신은 세토 가의 차기 가주이자, 후계자예요.
- 누구도 당신 대신해 그 자리에 오를 수 없어요. 어머니의 말을 명심하세요.
그랬던 어머니가 최근에는 오로지 그가 가주가 되는 것만이 복수의 완성이라는 듯 늘 그 말을 되뇌었었다. 아버지의 첩들이 하는 오욕을 참아야 했던 그녀는 이제 더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세상으로 떠나버렸다. 사토코가 데려온 새로운 이복 여동생 레이(麗)의 존재—그 모든 게 어머니의 마지막 인내를 깬 듯했다.
- 아키라, 어머니와 함께 가요. 행복한 곳으로...
그 순간의 기억이 또렷하게 머릿속을 관통했다. 자신만 남겨진 현실에서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꿈속에서조차 문득 어머니의 마지막 목소리가 들려와 잠에서 벌떡 깨곤 했다. 눈을 뜨면 빈 천장이, 얼룩진 벽지가, 말라붙은 목이 어제와 다름없이 자신을 짓눌렀다.
며칠을 그렇게 멍하게 보내다 보면, 머릿속 생각들이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가슴 어딘가가 둔하게 저렸다. 어찌할 수 없이 살아남은 자신—그 사실을 매번 떠올릴 때마다, 아키라는 이를 꽉 물고 견디는 법밖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깨달았다.
집 구석구석에 스며든 어머니의 그림자를 피하듯, 그는 일부러 후원을 오래 바라보았다.
'나는 살아있어야 해. 계속 이 집을 지켜야 해. 그래야 어머니가 괜히 이 모든 걸 감당했던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할 수 있어. 어머니가 바랐던 완벽한 가주가 되어야 해.'
그렇게 스스로에게 수십 번도 넘게 속삭이며, 그는 마루에 기대어 앉았다. 집 안 곳곳엔 아직 어머니의 손길이 남은 채로 시간이 멈춰 있었다. 정원 난간에 걸쳐진 차분한 수국 다발, 텅 빈 부엌 찬장,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다구(茶具)들과 찻잔—모든 게 그대로인데도, 집안 공기는 낯설도록 삭막했다.
퉁...
소즈의 움직임이 무심하게 공간을 갈랐다. 어머니의 장례 이후 아버지는 더 바빠지고 집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계모가 된 카와이 사토코의 기척이 부쩍 잦아졌다. 자애로운 안주인이라도 된 것 마냥, 조직원들을 다독이고 아키라를 챙기는 듯한 행동을 했지만, 그녀의 행동에는 어딘가 천박함이 끈적거리는 껌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가족 간의 식사하는 자리에 화려한 붉은 기모노를 입고 나온다던가, 과시하듯 명품으로 휘감은 이복 여동생 레이를 데리고 다닌다거나 하는 것을 보면 타고난 천성이란 것이 있는 것 같았다.
사토코는 어머니의 흔적을 지우기라도 하려는 듯 저택 안팎으로 소란을 피우기 일쑤였다. 언제나 전통적이고 고아하던 풍경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들로 바뀌고 있었다. 과시적으로 바뀐 물품들이 그녀의 취향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묵인하고 있었으므로 조직원들도 그런 풍경에 익숙해지려 애쓰고 있었다.
가장 화룡점정은, 그녀가 자꾸만 자신에게 돼먹지 않은 장난질을 친다는 것에 있었다.
"우리, 진짜 가족인 거야. 앞으로 잘 부탁해."
그렇게 말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가식적인 친절 속에 어딘가 비웃는 기색이 배어 있었다. 아버지의 눈앞에서 그를 조롱하듯. 그 미소에 있는 어떤 얕은 질감이 그를 숨이 막히게 했다. 억지로 밥을 먹으려 하면, 레이가 손으로 낫토를 만지작거리다 그의 밥그릇을 더럽혔다.
"어머, 벌써 오빠랑 친해지고 싶은가봐요, 여보."
사토코의 말투에는 묘한 뉘앙스가 묻어났다. 그는 그런 행태들에 입맛이 뚝 떨어져,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런 상황에도 아버지는 중재하기는 커녕 재미있다는 것처럼 보고만 있는 것이 가슴에 박힌 쇠못처럼 느껴졌다.
고작 네 살, 존재만으로는 미워할 수도 없는 아이였지만, 레이가 끔찍하게 느껴졌고 사토코는 악마의 하수인으로 보였다. 그들의 행동이 점점 더 그에게 어머니의 부재를 선연하게 각인시키고 있었다.
아이는 아무 잘못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레이가 그의 밥그릇을 더럽히는 순간마다,
어쩌면 일부러 그를 불쾌하게 하려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그러다가도 어린아이를 미워하는 자신이 추해서 한숨이 나왔다.
영겁 같던 식사 자리가 파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는 데 레이가 쪼르르 쫓아 와선 그의 옷자락을 잡으려 했다. 화가나 무심코 아이의 손을 확 치려고 하다 겨우 손끝에 힘을 뺐다. 금방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의 행동이 당황스러우면서도 그 우는 모습이 어머니를 잃은 자신 같아 그는 망연히 서 있었다.
"괜찮아요, 아가. 엄마 여기 있어."
사토코가 달려나와 마치 그가 아이를 울린 것마냥 어르고 달래며 힐난을 주는 것에는 다시 얕은 분노가 넘실거렸지만 후계자로서 이러면 안된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회피하고 말았다.
"옴마..."
아이가 엄마의 품에 얼굴을 부비며 울음으로 인해 통통한 볼이 발갛게 변한채 이쪽을 끝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어린 아이를 울렸다는 죄책감과 사토코에 대한 반감이 뒤섞여 마음이 진흙탕처럼 변하고 말았다.
퉁...
소즈의 움직임이 그의 마음을 달래듯 무심한 소리를 냈다. 지옥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