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네 번째 기억

# AKIRA 4화

  • 네 번째 기억 

 

계절이 한차례 바뀌고, 모두는 어느덧 새로운 환경에 조금씩 길들여졌다. 그 역시도 변화에 익숙해지려 애썼지만 마음속엔 매일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남들이 보기엔 모범적인 아들이자 떠오르는 후계자였지만, 집 안의 공기는 여전히 팽팽했다.

아직 볼에 아기살이 남은 어린 아키라의 눈빛에는 기묘한 어둠이 깃들었다. 밖으로만 나도는 아버지와 사갈같은 계모, 영악한 어린 동생 사이에서 버티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누구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기에 그는 스스로 어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아마도 이런 적막과 견고한 침묵을 자신의 몸에 감싸는 일이라는 것을 그는 배우고 있었다.

 

신년(新年)이 되자 오사카 본가에서 오오에도회의 신년회(新年会, しんねんかい)가 열렸다. 아키라는 아버지와 함께 신년 문안인사(年始回り, ねんしまわり)를 위해 그곳에 방문했다. 주요 간부와 후계자들이 모두 방문해야만 하는 중요한 자리, 그곳에 조직력 점검과 새로운 진의를 확인하기 위해 일제히 자리에 배석했다.

회장 도지마 다이고(堂島 大吾)가 신년사를 시작하고 순차적으로 간부들과 각계파별 대표들이 새해인사를 하는 자리에 아키라는 아버지와 함께 그의 앞으로 나아갔다. 충성을 맹세하고 물러나오는데 도지마 회장이 그에게 말했다.

 


「瀬戸家の後継者はお前で間違いないな?」(세토 가의 후계자는 네가 맞지?)

「はい。」(네.)

 

 

회장의 물음에 아키라는 한 치의 떨림도 없이 대답했다. 중후한 신사 같은 모습을 한 회장은 그의 대답에 눈을 가늘게 한 번 떴다가 뭔가를 가늠하듯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곤 천천히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お母さんのことが弱みにならなければいいがな。」
(어머니의 일이 약점이 되지 않길 바란다.)

 

 

그의 말에 아키라는 안색이 조금 변했지만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의 일이 약점이 될리가 없다. 그렇게 두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를 해쳤다고 해서 나약한 것이 아니란 것을 그가 증명할 것이었다. 회장은 더이상 말을 얹지 않았고 그는 아버지와 함께 자리로 돌아왔다. 다른 계파들이 인사를 하는 동안 그는 맞은 편을 응시하고 있다가 류지와 눈이 마주쳤다.

 

아키라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류지는 벌써 청소년의 태가 났다. 몬츠키 하카마(紋付袴)를 입고 준엄하게 앚아 있는 그의 모습은 아키라가 생각하던 후계자 그 자체였다. 아키라는 류지를 보던 시선을 거두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문득 무릎에 얹어진 주먹에 힘이 꾸욱... 들어갔다. 

 

그날 저녁 식사. 사토코는 평소보다 더 크게 웃으며 사람들을 맞았다. 한 번의 계절이 지나서 그런지 이제 제법 야쿠자 가문의 안주인 같은 모습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예법에 맞지 않는 붉은색 호우몬기(訪問着, 약식예복)을 입은 것이 눈에 찰리가 없었다.

 

 

「今夜は特別に用意しました。盛大な新年の宴ですから。」
(오늘 저녁은 특별히 준비했어요. 성대한 신년맞이 잔치니까요.)

 

 


저녁식사였지만 아사다 구미(浅田組)의 신년회를 겸했기 때문에 간부들도 일부 자리 했다. 물론 정식 신년회는 며칠 후에 하겠지만 회장을 만나고 왔기 때문에 회의가 필요했기에 겸사겸사였다.

 

 

「今年は順風満帆だ。みんな、頑張れよ。」
(올해는 순탄할 거다. 모두들 노력해라.)

 

 

아키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말의 진짜 의미를 헤아릴 틈이 없었다. 간부들이 우렁차게 술잔을 드는 동안 식탁 아래에선 레이가 조용히 아키라의 소매를 잡았다.

 

 

「お兄ちゃん、私と一緒に食べよう。」(오빠, 나랑 같이 먹자.)

 

 

아키라는 순간 손을 뿌리치고 싶었으나 주변 간부들의 눈이 많았으므로 꾹 참고, 아이가 건넨 계란말이 조각을 받아들었다.

 

 

「ありがとう。」(고마워.)

 

그 순간을 포착한 사토코의 눈길이 번뜩였다. 그녀의 새빨간 립스틱을 바른 입술이 살짝 올라간다 싶더니 높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家族がこんなに仲良くいられてよかったね。でしょ、親分?」
(우리 가족이 이렇게 화목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그렇죠, 오야붕?)

 

사정을 아는 간부들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대답하지 않아도, 이미 모든 게 연극임을 서로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잠시 시선을 거두더니 식사를 끝내고 방을 나갔다. 남은 식탁엔 사토코의 높은 웃음과 레이의 조심스러운 미소, 그리고 아키라의 얼어붙은 얼굴만 남았다.

식후, 사토코는 괜히 레이를 품에 안으며 은근히 말했다.

 

 

「レイとアキラが仲良くしてるから、うちの家もますます温かくなった気がするよ。」
(레이와 아키라가 화목하니 우리집이 더욱 따뜻해진 것 같구나.)

 


아키라는 저도 모르게 코읏음을 지었다. 사토코의 말이 일순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혹여 아키라를 달래고 싶었을까. 아니, 자신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우위를 드러내고 싶었던 것일지도.

 

밤에 혼자 남은 마루에서, 아키라는 참았던 울분을 긴 한숨으로 쏟아냈다. 허옇게 얼어붙은 입김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반드시 이 집의 진짜 주인이 되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어머니께서 견딘 것마저 수치가 되고 만다.

 

창 너머에서 이름 모를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지붕끝에 앉았다. 아키라는 오랫동안 그 새를 바라보며, 자신이 영원히 울지 않을 것을—울지 않아야만 이 집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임을, 마음 한구석에 써 내려갔다.

 

 

누구보다 완벽한 후계자, 절대 무너지지 않는 가주가 되리라.

 

 

그 결의가 이 어둡고 고요한 집의 한가운데에서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