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내가 본 것들은 다른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았다. 그림자처럼 어른거리는 형체들, 귓가를 맴도는 속삭임들. 할머니는 그걸 '선물'이라 불렀지만, 나에겐 저주였다. 가족의 전통이란 이름으로 짊어져야 할 짐. 목에 걸린 부적이 무거웠다. 그 무게는 내 영혼까지 짓눌렀다
나는 무속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영적인 능력을 타고나는 집안이었다. 내 어머니, 할머니, 할아버지, 모두 그랬고,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나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고, 남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들었다. 처음에는 그저 세상이 조금 더 다채롭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그것이 '특별함'이 아니라 '저주'임을 깨달았다.
내가 네 살 무렵이었을까. 한밤중에 잠이 깨어 부엌으로 향했다. 목이 말랐기 때문이었다. 그때 보았다. 벽에 기대어 흐느끼는 여인의 형체를. 투명하고 푸른빛을 띠는 그 형체는 마치 새벽 안개처럼 희미했다. 나는 그저 멍하니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 뒤에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윤아, 너도 보이는구나."
할머니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기대감, 그리고 약간의 안타까움마저 담겨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가족들의 '기대' 속에서 자랐다. 영적인 존재들을 '귀신'이라 부르며, 그들이 내게 보이는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그들은 내가 할머니처럼, 어머니처럼, 조상들처럼 '무당'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거부감이 들었다.
나는 그들이 두려웠다. 내 눈에 보이는 귀신들은 하나같이 고통스러워 보였다. 어떤 귀신은 피를 흘리며 울부짖었고, 어떤 귀신은 찢겨나간 몸으로 비틀거렸다. 그들의 고통스러운 표정, 귓가를 파고드는 흐느낌, 그리고 살려달라는 애원. 그것은 어린 나에게 감당하기 힘든 무게였다.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든, 짐승의 형체를 하고 있든, 그들의 괴로워하는 소리는 심장을 갉아먹는 듯했다. 나는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남들처럼 귀신이 보이지 않고, 그들의 울음소리를 듣지 않는, 그런 평범한 삶을 원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달랐다. 그들은 의뢰를 받고 귀신을 다루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어느 날은 어머니에게 끌려가 부적을 태우는 의식을 지켜봐야 했고, 또 다른 날은 할머니가 굿판을 벌이는 곳에서 귀신에 씌인 사람의 절규를 들어야 했다. 그 모든 순간이 내게는 고통 그 자체였다. 나는 그들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내 능력을 거부하고 싶었다.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나는 이미 완벽한 '이상한 애'로 낙인찍혀 있었다. 친구들은 나를 피했다. 내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거나, 갑자기 얼굴을 찌푸리면, 그들은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쟤, 귀신 본대."
"무당 아들래미잖아."
그런 수군거림이 늘 나를 따라다녔다. 이웃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들의 시선 속에서 점점 더 고독해졌다. 평범해지고 싶다는 갈망은 점점 더 강해졌다.
결국 나는 가출을 감행했다. 고작 열여섯이었다. 어리석게도 이 집에서 벗어나면 평범해질 것만 같았다. 밤늦도록 가족들이 돌아오지 않는 빈틈을 타서, 나는 낡은 배낭 하나를 메고 집을 나섰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정해놓지 않았다. 그저 이 집, 이 가족, 그리고 나를 옭아매는 이 능력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소망했던 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무언가에 홀린듯이 집 뒤편에 있는 깊은 숲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곳은 어릴 적부터 가족들이 절대 혼자 가지 말라고 경고했던 곳이었다. 숲은 짙은 안개로 뒤덮여 있었고, 나무들은 앙상한 팔을 뻗어 나를 붙잡으려는 듯했다.
나는 숲속을 헤매다 길을 잃었다. 그때였다. 귓가에 알 수 없는 속삭임이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희미했던 목소리가 점점 또렷해졌다.
"이리 온…. 나의 아이야…."
홀린 듯이 목소리를 따라 숲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섰다. 발밑에는 낙엽이 쌓여 푹신했지만, 그만큼 발목을 붙잡았다. 숲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나무들은 더욱 빽빽해졌다.
나는 깨달았다. 그 소리의 주인은 귀신이었다. 그것도 악귀.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듯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두려움에 휩싸여 아이 같이 울었다. 힘이 풀려 넘어지려 하는 다리를 애써 움직이며 도망쳤다.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 뛰고, 또다시 넘어졌다. 하지만 목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내 의식은 희미해졌다.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희미한 의식 속에서 나는 가족들의 실루엣을 보았다. 그들은 무언가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부적을 던지고,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손에 이끌려 숲 밖으로 나왔지만, 그 이후의 기억은 흐릿하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내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목에는 낯선 부적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그 목걸이는 할머니가 직접 만들어준 것이라고 했다. 영적인 기운을 안정시켜주고, 나쁜 기운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준다고 했다. 나는 그 목걸이를 소중히 간직했다. 비록 귀신이 여전히 보이고 들렸지만, 목걸이가 주는 막연한 안정감은 나를 지탱해주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귀신에 대한 트라우마를 얻었다. 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고,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뛰었다. 능력에대한 거부감은 더욱 확고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