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

*봄밤의 따스한 바람이 홍등가를 스쳐 지나가는 저녁, 붉은 등불들이 골목을 물들이고 있었다.* *서담은 2층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오늘도 여러 남자와 여자들이 그를 찾아왔지만 모두 핑계를 대며 만나지 않았다. 하얀 한복 저고리가 달빛에 더욱 창백해 보이는 그의 모습은 마치 선녀 같았다.* 또 피했구나.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서담은 몸을 돌렸다. 유곽의 주인인 월담루(月潭樓) 마님이 부채를 부채질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마님 | 언제까지 이렇게 버틸 생각이냐? 너도 이제 성인이 되었는데. *서담은 창밖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서담 |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그의 목소리에는 애원과 체념이 동시에 묻어있었다. 마님은 고개를 저으며,* 마님 | 내일까지만 기다려주마. 그 후엔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말을 끝내지 않고 돌아섰다. 서담은 다시 창가로 몸을 돌리며 어머니의 비녀를 꼭 쥐었다.* . . . . . . *마님이 떠난 복도는 잠시 적막에 휩싸였다. 쿵, 쿵, 하고 울리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선명했다. '내일'이라는 단어가 독이 든 비수처럼 서담의 가슴에 박혔다. 어머니의 비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차갑고 단단한 감촉만이 지금 그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현실이었다. 창밖의 소란스러운 웃음소리와 흥겨운 가락 소리가 그가 처한 현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저 소음 속 어딘가에, 자신을 '상품'으로 여기는 이들의 욕망이 번들거리고 있을 터였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발목에는 보이지 않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그때였다. 삐걱이는 나무 계단을 오르는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유곽을 드나드는 수많은 사내들의 발소리와는 어딘가 다른, 침착하면서도 무게감 있는 소리였다. 서담은 본능적으로 몸을 굳혔다. 또 누구일까. 자신을 사겠다며 돈다발을 흔들던 상인일까, 아니면 음흉한 눈으로 몸을 훑던 늙은 관리일까. 경계심으로 날을 세운 채, 그는 소리가 들려오는 복도 끝을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 한 사내의 그림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등불 빛이 그의 윤곽을 비추자, 서담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여태껏 월담루에서 보아왔던 사내들과는 격이 다른 위압감과 기품이 느껴졌다. 반듯한 어깨와 훤칠한 키,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듯한 흑발과 갓 아래로 드러난 잘생긴 얼굴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특히, 검은 비단 도포에 수놓아진 붉은 피안화 자수는 기이할 정도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죽음과 슬픈 이별을 상징하는 꽃. 어찌 저런 불길한 꽃을 옷에 새겨 넣은 것일까.* *사내는 곧장 서담이 서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목적지가 여기였다는 듯이.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질수록 서담의 심장은 불안하게 나뒹굴었다. 사내의 시선이 정확히 자신에게 꽂혀 있음을 깨달은 순간, 서담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려 했다. 하지만 등 뒤는 차가운 벽이었고,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사내의 검은 눈동자 속에서 언뜻 스치는 붉은빛이 등불 빛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결국 사내는 서담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 그에게서는 희미하게 좋은 향내와 함께 서늘한 밤공기 냄새가 났다. 방탕한 생활로 유명한 영의정 댁 도련님, 류이현. 그의 악명 높은 소문은 서담의 귀에도 들어온 적이 있었다. 저 아름다운 얼굴 뒤에 숨겨진 것은 무엇일까. 탐욕일까, 아니면 단순한 호기심일까. 서담은 애써 태연한 척하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길고 흰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감추기 위해, 그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제발, 그저 지나가는 길이기를. 자신을 보지 못했기를. 헛된 바람이 마음속에서 메아리쳤다.* "네가... 그 꽃봉오리로구나." *나직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생각보다 훨씬 깊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부드러움 속에 담긴 소유욕을, 유곽에서 나고 자란 서담이 모를 리 없었다.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여, 남자의 시선을 피했다. 자신을 탐하는 시선에 익숙해지려 노력했지만, 이토록 노골적이면서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은 처음이었다.* *사내의 손가락이 닿는 순간, 서담은 마치 얼음물이라도 끼얹은 듯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예상치 못한, 너무나도 대담하고 직접적인 접촉이었다. 그의 손등이 턱선을 따라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그 짧은 순간이 마치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거칠 것 같았던 예상과 달리, 사내의 손길은 의외로 부드러웠으나 그 안에 담긴 노골적인 평가는 서담의 자존심을 날카롭게 할퀴었다. 익숙해지려 해도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자신을 물건처럼 감상하고 값을 매기는 듯한 시선과 손길이었다. 몸이 유난히 민감한 탓에, 스쳐 지나간 자리에는 불쾌한 열기가 소름과 함께 피어올랐다.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려 했지만, 등 뒤의 차가운 벽이 그의 퇴로를 막고 있었다.* "아름답군, 소문대로." *나직한 칭찬은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확인이었고, 선언이었다. '소문으로 듣던 물건이 과연 쓸 만한지 직접 보니 만족스럽다'는 듯한 뉘앙스. 서담은 모욕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핏기가 가실 정도로 하얗게 질린 얼굴 위로, 사내의 손길이 닿았던 부위만 붉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 그를 쏘아보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지만, 차마 그럴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저 굳게 닫힌 제 방문과, 그 너머에 있을 한 줌의 평온만을 생각하며 필사적으로 동요를 감추려 애썼다. 제발, 이대로 흥미를 잃고 가버리기를. 간절한 바람이 속에서만 맴돌았다.* *그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것일까. 사내는 만족스러운 듯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미소는 서담의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이 남자는 다르다. 돈으로 환심을 사려던 다른 사내들과는 시작부터가 달랐다. 그는 마치 사냥감을 앞에 둔 맹수처럼 여유롭고, 자신의 매력과 권위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 자신감 넘치는 태도가 서담을 더욱 초라하고 무력하게 만들었다. 어머니의 유품인 비녀를 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것만이 지금 이 순간, 굴욕감 속에서 자신을 지탱해주는 유일한 자존심이었다.* *한참 만에, 서담은 겨우 목소리를 쥐어짰다. 떨림을 감추기 위해 평소보다 훨씬 더 차갑고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용무이신지 모르겠으나, 사람을 잘못 보셨습니다." *고개를 숙인 채 내뱉은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당신이 찾는 '꽃봉오리'는 내가 아니라는, 서툰 부정이었다. 부디 이 말이 그를 불쾌하게 만들어, 이 자리에서 떠나게 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 남자가 자신의 거절을 간단히 무시해버릴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붉은 등불 빛이 흔들리며,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유곽의 소음은 아득하게 멀어지고, 복도에는 오직 숨 막히는 긴장감만이 가득했다.* *사내의 낮은 웃음소리는 복도의 무거운 공기를 가르며 서담의 귓가에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그것은 조롱이나 비웃음이라기보다는, 어린아이의 서툰 반항을 지켜보는 어른의 여유 같은 것이었다. 그 여유로움이 서담의 가슴을 더욱 세게 짓눌렀다. 그의 필사적인 부정이 너무나도 쉽게, 가볍게 일축당했다.* "그대의 얼굴이 이미 맞다고 대신 말하고 있는 것 같다만." *이 말은 서담이 가장 증오하는 현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잔인한 선고와도 같았다. 결국 자신은 이 외모 때문에 모든 이들에게 '꽃봉오리'로 낙인찍히고, 결코 한 명의 온전한 인간, 서담으로 불릴 수 없다는 절망감이었다. 화가 치밀어 올라 목구멍까지 뜨거운 것이 차올랐지만, 그것을 뱉어낼 힘도, 자격도 자신에겐 없었다.* *분노와 수치심이 뒤엉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감정을 숨기려 더욱 굳게 입술을 깨물자, 입안에서 희미한 비린 맛이 느껴졌다. 차라리 이 얼굴이 아니었다면. 어머니를 닮아 곱다는 이 얼굴이 아니었다면, 이런 굴욕적인 상황에 처하지 않아도 되었을까. 찰나의 순간,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자신을 향한 혐오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그 감정들을 억누르며, 그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이대로라면 이 사내는 정말로 자신을 '소유'하려 들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서담은 마침내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마주한 사내의 눈은 붉은 등불 빛을 받아 더욱 기묘한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에 정면으로 시선을 맞추는 것은 마치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한 아찔함을 동반했다. 하지만 물러설 수는 없었다. 여기서 시선을 피한다면, 그것은 곧 패배를 인정하는 셈이었다. 그는 애써 담담하고 냉정한 표정을 지으며,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소문이란 뜬구름과 같은 것입니다. 뜬구름을 잡으려 애쓰시기보다, 나리께 어울리는 진짜 꽃을 찾아가시는 것이 현명할 터." *그것은 정중한 거절의 형식을 띤, 날 선 경고였다. 나는 당신이 찾는 그런 사람이 아니며, 당신의 유희에 어울려줄 생각이 없다는 뜻을 최대한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동시에, 그는 병약한 척 연기하기 위해 일부러 마른기침을 작게 터뜨리며 이마를 짚었다. 늘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아픈 사람에게까지 억지를 부리는 무뢰한은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창백한 안색과 가늘게 떨리는 몸짓이 더해져, 그의 연기는 꽤 그럴듯해 보였다.* "보시다시피... 저는 몸이 병약하여 손님을 모실 형편이 못 됩니다. 부디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그의 눈빛은 간절했다. 제발, 나의 이 초라한 연기에 속아 넘어가 주기를. 당신의 그 오만하고 자신감 넘치는 얼굴에 실망과 귀찮음이 떠오르기를. 그러나 사내는 서담의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미동도 없이 그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시선은 서담의 가녀린 목선과 하얀 저고리 아래 희미하게 드러난 쇄골, 그리고 비녀를 꽉 쥔 하얀 손을 차례로 훑었다. 그 시선이 닿는 곳마다 불에 덴 듯 뜨거웠고, 서담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이 남자는, 자신의 서툰 계략 따위는 이미 모두 꿰뚫어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사내의 얼굴이 예고 없이 가까워졌다. 서담은 숨을 헙, 들이마셨다. 피할 새도 없이 그의 숨결이 귓가를 간질이며 파고들었다. 그에게서 나던 서늘한 향이 더욱 짙게 느껴지며, 마치 독처럼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듯했다. 서담의 모든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등 뒤의 차가운 벽과 눈앞의 뜨거운 사내 사이에 갇혀, 그는 완전히 고립무원의 상태였다.* "대개는 시들한 꽃을 버리지만... 나는 꽃을 말려서라도 가지는 사람이라 말이지." *귓가에 울리는 나직한 속삭임은 마치 사형 선고처럼 들렸다. 서담이 필사적으로 내세웠던 '병약함'이라는 방패가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시들면 버려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거늘, 이 남자는 그 이치마저 거스르겠다고 선언하고 있었다. 말려서라도 가지겠다. 그 말은 생기가 사라지고 빛이 바래도, 어떻게든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끔찍한 집착의 다른 이름이었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그동안 자신을 탐했던 다른 사내들과는 차원이 다른, 지독하고 끈질긴 소유욕이 서담의 숨통을 옥죄어왔다.* "이거 그대에게는 아쉽게 됐어, 안 그런가?" *고개를 든 사내의 얼굴에 걸린 피식하는 웃음은 서담의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 비웃는 듯했다. 그의 붉은빛이 도는 검은 눈동자에는 명백한 승리자의 여유와 함께, 곤경에 빠진 작은 동물을 바라보는 듯한 잔인한 흥미가 서려 있었다. '아쉽게 됐다'는 말에 서담은 대답할 말을 잃었다. 그래, 아쉽게 되었다. 하필이면 오늘, 마님의 최후통첩을 받은 이 절망적인 밤에, 이런 최악의 상대를 만나버렸으니. 운명의 장난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가혹했다.* *수치심과 공포가 뒤섞여, 서담의 하얀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저도 모르게 긴장으로 뻣뻣해진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어릴 적부터 생긴, 불안하거나 당황스러울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사내의 시선이 자신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이는 것을 느끼자, 서담은 화들짝 놀라며 손을 거두었다. 자신의 약한 모습을 들켜버린 것만 같아 더욱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사내의 시선을 피하며 바닥으로 고개를 떨궜다. 차라리 시선을 마주하고 쏘아붙일 수라도 있다면 좋으련만, 압도적인 존재감 앞에서 그의 자존심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비녀를 쥔 손이 잘게 떨려왔다. '네가 진정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이것을 주거라.' 어머니의 유언이 귓가에 맴돌았다. 진정한 사랑. 지금 눈앞의 남자는 그가 꿈꾸던 이상과는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그는 사랑이 아닌 소유를 말하고, 교감이 아닌 굴복을 원하고 있었다. 이 남자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것은 어머니와의 약속을, 그리고 자신의 삶 전체를 배반하는 행위였다. 그 생각에 이르자, 꺼져가던 저항의 불씨가 희미하게 되살아났다.* *서담은 떨리는 숨을 애써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이전보다는 조금 더 단단했다.* "...나리께서 찾으시는 것은 꽃일지 모르나, 저는 그저 이름 없는 들풀일 뿐입니다. 말린 들풀은 그저 땔감으로나 쓰일 뿐, 귀한 분의 방을 채울 만한 가치는 없습니다." *그것은 그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자신을 한껏 낮추어, 당신이 가질 만한 가치가 없는 하찮은 존재라고 말하는 것. 부디 이 말에 흥미를 잃고, 더러운 것을 보듯 자신을 내버려두고 떠나가 주기를. 그의 맑은 눈동자에는 체념과 함께 마지막 남은 간절함이 물기처럼 어려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알지 못했다. 그의 그런 위태롭고 처연한 모습이, 사냥꾼의 정복욕을 얼마나 더 자극하는지를.* *서담의 마지막 자존심을 건 한마디는 허공으로 흩어졌다. 사내는 그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 방에 말린 들풀을 놓든, 작은 돌멩이를 놓든 내게 무어라 할 사람은 없는 걸 그대가 모르나 보군?" *그 오만불손한 말에 서담은 할 말을 완전히 잃었다. 그래, 영의정 댁 도련님. 이 나라에서 그에게 감히 무어라 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자신의 하찮은 비유와 애처로운 저항이 얼마나 우스웠을까. 절망감이 파도처럼 밀려와 그의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잠식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체념이 그의 눈빛을 흐리게 만들었다.* *생각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사내의 팔이 그의 어깨를 강하게 감싸 안았다. 피할 틈도 없이 단단한 몸에 가두어진 서담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너무나도 가깝게 느껴지는 사내의 체온과 힘에 온몸이 속박당한 듯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남성다운 탄탄한 근육이 얇은 저고리 너머로 느껴져, 서담은 수치심과 함께 알 수 없는 공포에 휩싸였다. 자신과는 너무나도 다른,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다시, 악마의 속삭임 같은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벗어나려 하지 않는 게 좋을게야. 그럼 내가 이불 위에서 친절히 대해줄지, 누가 알겠느냐." *그 말은 부드러운 협박이자,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친절히 대해주겠다'는 말의 의미를 유곽에서 자란 서담이 모를 리 없었다. 그것은 고통스럽지 않게, 부드럽게 너의 처음을 가져가 주겠다는 잔인한 약속이었다. 저항하면 더 끔찍한 일을 당할 것이라는 무언의 경고와 함께. 서담의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눈앞이 아찔해지며, 붉은 등불 빛이 빙글빙글 도는 듯했다. 발버둥 쳐봐야 소용없다. 이 남자는 작정하고 자신을 '사냥'하러 온 것이다. 마님의 최후통첩, 그리고 이 남자의 등장은 마치 짜기라도 한 듯 그의 모든 퇴로를 완벽하게 차단해버렸다.* *빙긋 웃는 사내의 얼굴을 보며, 서담은 처음으로 진정한 공포를 느꼈다. 그 웃음은 더 이상 여유롭거나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먹잇감의 숨통을 끊기 직전의 포식자가 짓는, 잔혹하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어머니의 비녀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비녀를, 이 남자의 눈앞에서 깨뜨려 버릴까. 아니, 그랬다가는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버린 듯,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사내의 팔에 속박된 채, 그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무력한 인형이 된 기분이었다.* *사내의 손이 그의 어깨를 감싼 채,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 손길은 위로가 아닌, 소유를 확인하는 낙인이었다. 서담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민감한 등이 그의 손길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원치 않는 전율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그 반응이 스스로에게 너무나 수치스러워, 서담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몸으로 태어난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진정한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낯선 남자의 손길에 이렇게나 쉽게 반응해버리는 자신의 몸이 저주스러웠다.* *결국, 그는 모든 저항을 포기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한들, 이 남자를 돌려보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텅 빈 눈동자는 바닥의 나뭇결만을 무심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침묵은 암묵적인 동의였다. 굴복의 표시였다. 이제 남은 것은 이 남자가 자신을 어디로 끌고 갈지, 그리고 그 '이불 위'에서 어떤 '친절'을 베풀 것인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뿐이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마음속으로 되뇌는 사죄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흩어졌다. 따스했던 봄밤의 공기는 어느새 그의 숨통을 조이는 차가운 족쇄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