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선
시간은 잔인하게 흘렀다. 동탁의 곁에서 여포는 빠르게 변해갔다. 그녀의 이름은 전장에서의 무력과 잔혹함으로 알려졌다. 동탁은 여포의 광기를 부추겼고, 그녀를 최전선에 세웠다. 반군 토벌, 민심 진압… 여포는 피 묻은 칼로 동탁의 앞길을 닦았다.
전장은 여포에게 익숙한 공간이었다. 숲과 닮아 있었다. 약육강식의 법칙만이 통하는 곳. 그녀는 자신 안에 잠재된 파괴성을 거리낌 없이 쏟아냈다. 피를 보는 것, 살을 찢는 것, 비명을 듣는 것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억눌렸던 감정들이 폭발하는 전장에서 그녀는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전투가 끝나면 다시 공허함이 밀려왔다. 피 냄새 가득한 밤, 홀로 남겨진 여포는 다시 숲 속 짐승처럼 움츠러들었다. 동탁은 그녀에게 명성과 두려움을 안겨줬지만, 인간적인 온기는 조금도 주지 않았다. 그는 여포를 자신의 개처럼 다뤘다. 명령하고, 부려먹고, 만족하면 잠시 시선을 줄 뿐이었다. 쓰다듬어주는 법 같은 건 없었다. 칭찬조차도 그녀의 능력을 이용하기 위한 계산적인 단어들이었다.
여포는 점점 더 난폭해졌다. 동탁의 방치 아래 그녀의 내면은 더욱 황폐해졌다. 사람들은 그녀를 두려워했고 피했다. 그녀에게 다가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자신을 괴물이라 여기는 세상의 시선 속에서 여포는 더욱 깊은 외로움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동탁의 저택에 새로운 여인이 들어왔다. 이름은 초선.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동탁은 그녀에게 흠뻑 빠졌고, 아낌없는 총애를 베풀었다. 초선은 동탁의 곁에 앉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했고, 고운 손으로 차를 따랐다.
여포는 초선을 경계했다. 아름다움이란 그녀에게 낯선 것이었다. 숲에서도, 정원 곁에서도, 동탁 곁에서도 그녀는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었다. 초선에게서 느껴지는 부드러움과 연약함은 여포에게 생경했다. 동시에 알 수 없는 질투심이 일었다. 동탁이 초선에게 보이는 친절함과 관심이 부러웠다. 자신에게는 결코 보여주지 않는 모습이었기에.
동탁은 여포에게도 초선을 소개했다. "이 아이가 초선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자매처럼 지내야 한다."
자매라니. 여포는 코웃음을 쳤다. 피 묻은 자신과 저 여인이 자매가 될 수 있을 리 없었다. 여포는 초선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짧게 대답했다. "...알았다."
초선은 여포의 차가운 태도에도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여포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여포 장군님께서는 정말 대단하십니다. 동탁 장군님께서 늘 칭찬하셔요.” 초선이 부드럽게 말했다.
칭찬이라니. 동탁의 칭찬이 얼마나 공허한 말인지 여포는 잘 알고 있었다. 여포는 초선의 말이 듣기 싫었다. 그녀의 상냥함이 오히려 위선적으로 느껴졌다.
“또 그 소리냐.” 여포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초선은 여포의 태도에 상처받지 않았다. 오히려 여포의 곁을 맴돌았다. 여포가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면 시원한 물을 건넸고, 상처를 입고 오면 약초를 발라주려 했다. 여포는 번번이 그런 초선을 밀어냈다.
“…만지지 마.” 여포는 초선의 손을 피하며 말했다. 타인의 온기가 두려웠다. 특히 초선의 온기는 더욱.
초선은 여포의 반응에 슬픈 기색을 보였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포가 외로워 보인다는 것을 알았다. 숲 속에서 버려진 짐승처럼, 인간 사회에서도 홀로 떠도는 존재라는 것을. 초선은 그런 여포에게 연민을 느꼈다.
여포는 초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자신에게 잘해주는 것일까? 정원처럼 자신을 이용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동탁처럼 도구로 만들려는 것일까? 그녀에게 세상의 모든 관계는 계산적이거나 기만적이었다.
하지만 초선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곁에 앉아 조용히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여포는 말이 없었지만, 초선은 혼자서도 조곤조곤 이야기를 이어갔다. 들려주는 이야기는 황궁의 소문이거나, 시장의 풍경이거나, 혹은 자신이 겪었던 소소한 일들이었다. 여포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초선은 개의치 않았다.
어느 날, 여포는 훈련 도중 크게 다쳤다. 칼에 베이고 넘어지고, 몸 곳곳에 피가 맺혔다. 훈련은 지독했고, 동탁의 노성은 귓가에 박혔다. 여포는 비틀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 도착했을 때, 초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여포의 상처를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쩌다 이렇게…!” 초선이 달려와 여포의 팔을 잡으려 했다.
여포는 반사적으로 초선의 손을 뿌리쳤다. “…가까이 오지 마.”
초선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상처가 너무 심하세요…”
“죽든가 말든가.” 여포가 건조하게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스스로에 대한 경멸이 담겨 있었다.
초선은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여포의 앞에 앉아 망설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프지 않으신가요… 몸도, 마음도…”
여포는 초선을 쳐다봤다. 아프지 않냐고? 늘 아팠다. 숲에서부터, 정원 곁에서, 동탁 아래에서. 몸의 상처는 눈에 보였지만, 마음의 상처는 깊숙이 숨겨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자신조차도 외면하고 싶었던 영역이었다.
초선은 여포의 복잡한 눈빛을 읽은 듯했다. 그녀는 눈물을 닦고 희미하게 웃었다.
“저는… 장군님께서 외로워 보이세요.” 초선이 작게 말했다. “강하시지만… 어딘가 슬퍼 보이세요.”
여포는 초선의 말에 심장이 찔리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자신 안에 숨겨왔던 가장 깊은 상처를 건드린 말이었다. 외로움. 그것은 그녀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감정이었다.
여포는 더 이상 초선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헝클어진 흑발이 피로 더럽혀진 얼굴을 가렸다.
“…몰라.” 여포가 작게 중얼거렸다. 대답인지, 회피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대답이었다.
초선은 여포의 어깨에 손을 얹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여포 곁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함께 있어 주었다. 초선의 존재 자체가 여포에게는 낯선 위안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여포는 서서히 마음의 경계를 풀었다. 초선의 침묵은 정적인 숲의 고요함과 비슷했다. 강요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그저 존재하는 것.
여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초선은 여전히 곁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연민과 온정이 가득했다. 거짓이나 계산이 보이지 않았다.
여포는 망설이다가 작게 물었다. "...왜 나에게 잘해주는 거지?"
초선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냥요.”
이유가 없다는 초선의 대답은 여포에게 더욱 생경했다. 그녀의 세상에서는 모든 행동에 이유가 있었다. 특히 인간의 행동에는.
“…나는… 위험해.” 여포가 말했다. “괴물 같다고.”
초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저 상처 입으셨을 뿐이에요.”
상처 입었다니. 그녀에게 그렇게 말해준 인간은 처음이었다. 모두 그녀를 두려워하거나 이용하려 할 뿐이었다.
그날 이후, 여포와 초선 사이에는 묘한 유대감이 형성되었다. 여포는 여전히 퉁명스럽고 감정 표현이 서툴렀지만, 초선을 밀어내지 않았다. 초선은 여포의 곁을 지켰고, 그녀의 말 없는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동탁은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오직 자신의 권력과 초선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여포에게 초선은 동탁의 총애를 받는 아름다운 여인이 아닌,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곁에 있어주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초선은 여포에게 세상의 다른 면을 보여줬다. 잔혹하고 계산적인 동탁의 세상과는 다른, 부드러움과 연약함이 존재하는 세상. 여포는 초선을 통해 잊고 있던 인간적인 감정들에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녀에게 새로운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동시에, 그녀 안에 잠재된 파괴성과 외로움은 멈추지 않고 자라나고 있었다. 자신을 괴물로 만든 것은 세상이라고 굳게 믿고, 그 세상에 칼을 겨누는 것으로 반응하는 여포. 그런 그녀의 곁에 초선이라는 작은 빛이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작은 유대감이 앞으로 어떤 비극을 불러올지는 아직 둘은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