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
붉은 노을이 전장을 물들였다. 땅은 피와 먼지로 얼룩져 있었다. 여포는 검을 쥔 채 서 있었다. 주위는 시체와 부상병들의 신음뿐이었다. 전투는 끝났지만,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칼날 소리가 맴돌았다.
피 묻은 갑주는 무겁게 느껴졌다. 전투 후의 공허함이 그녀를 짓눌렀다. 숲 속 짐승처럼 본능으로 움직였던 시간들은 이제 끝났다. 동탁의 칼날이 되어 피의 길을 걷고 있었다.
낯선 얼굴들이 그녀를 경계하며 지나갔다. 병사들의 눈빛에는 두려움과 동시에 광신이 뒤섞여 있었다. 그들은 그녀의 잔혹함을 두려워하면서도, 그녀의 무력을 숭배했다. 괴물. 그들은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속으로든 겉으로든.
여포는 그들의 시선을 무시했다. 익숙했다. 숲에서 세상은 그녀를 괴물로 만들었다고 믿었다. 이제 그녀는 스스로 그 괴물이 되어 세상을 향해 칼을 겨누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피 냄새와 흙먼지 속에서 문득 다른 냄새가 느껴졌다. 숲의 냄새. 서늘하고 축축한 흙과 나무 냄새.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울창한 숲이었다.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아이는 나뭇가지에 앉아 있었다. 아래에서는 정원이 책을 읽고 있었다.
“이것은 태사공 사기(史記)다.” 정원이 말했다. “옛 위인들의 이야기이지.”
소녀는 책에 흥미가 없었다. 그녀는 그저 정원의 목소리를 들었다. 숲의 소리만큼이나 익숙해진 목소리였다.
“사마천은 역사를 기록하는 자였다.” 정원이 책을 덮었다. “그는 옳고 그름을 가르고, 인간의 삶을 기록했다.”
소녀는 정원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는 늘 진지했다. 그녀를 인간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정원은 아이를 내려다봤다. “너도 언젠가 너의 역사를 쓰게 될 것이다.”
역사. 아이에게는 너무나 먼 이야기였다. 아이는 그저 살아남고 싶을 뿐이었다.
“강해져야 한다, 여포야.” 정원이 말했다. 그의 눈빛은 엄격했지만, 그 안에 애정이 담겨 있었다. “이 세상은 약한 자에게는 잔인한 곳이다.”
잔혹한 곳. 아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숲에서 홀로 살아남으며 뼈저리게 느꼈다.
정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는 움찔했지만, 피하지 않았다. 정원의 손길은 거칠었지만 따뜻했다. 인간의 온기. 숲에서 처음 만나 그에게서 느꼈던 온기.
“원망할 때가 많았습니다.” 전장 속의 아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를 가두고, 나를 억압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내게 이름을 주었고, 살아가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회상이 끝났다. 숲과 정원의 얼굴이 사라지고, 다시 피 묻은 전장이 나타났다. 차가운 현실이 그녀를 감쌌다.
정원의 온기는 이제 없었다. 그녀의 손으로 직접 끊어냈다. 동탁의 곁에는 온기 대신 계산과 이용만이 존재했다.
“…역사.” 여포가 낮게 중얼거렸다. “나의 역사… 피로 쓰여지는구나.”
병사 하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장군님, 정리되었습니다.”
여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병사를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핏자국이 땅에 새겨졌다.
저택으로 돌아왔다. 동탁은 승리에 만족하며 초선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동탁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기름지고 시끄러운 웃음소리.
여포는 식당 문 앞에서 멈춰 섰다. 피 묻은 모습 그대로였다. 병사들이 그녀를 보고 물러섰다. 초선이 그녀를 발견하고 눈빛이 흔들렸다. 걱정과 슬픔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동탁도 여포를 봤다. “왔느냐, 여포야!” 그의 목소리가 활기 넘쳤다. “네 덕분에 또 큰 승리를 거두었다!”
여포는 아무 말 없이 동탁과 초선을 바라봤다. 초선은 일어나 여포에게 다가오려 했다.
“아프지 않으신가요… 몸도, 마음도…” 며칠 전 초선이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몸은 아팠다. 칼에 베이고, 맞고 부딪히며 만신창이가 되었다. 마음은… 늘 아팠다. 숲에서 버려졌을 때부터, 정원 곁에서, 동탁 아래에서도.
“장군님…” 초선이 여포의 곁에 섰다.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따뜻했다.
여포는 초선의 얼굴을 보았다. 상처 입었다는 것을 알아봐 주는 유일한 사람. 괴물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유일한 사람. 그녀에게 작은 희망을 안겨준 존재.
동탁이 초선을 불렀다. “초선아, 어서 와서 앉거라. 피 냄새가 나는구나.” 그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짜증이 섞여 있었다.
초선은 잠시 망설였다. 여포의 핏빛 모습과 동탁의 짜증스러운 목소리 사이에서 갈등하는 듯했다.
여포는 초선을 바라봤다. 그녀의 마음속에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질투, 감사, 그리고 연민. 초선은 자신과 달랐다. 잔혹함이 아닌 부드러움으로 살아가는 존재. 동탁에게 총애받지만, 동시에 동탁의 악행에 괴로워하는 존재.
“초선아.” 여포가 나지막이 초선을 불렀다.
초선은 여포를 돌아봤다.
“가거라.” 여포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건조했지만, 그 안에는 무언가 다른 감정이 실려 있었다.
초선은 여포의 눈빛을 읽은 듯했다.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동탁에게로 돌아갔다.
여포는 초선이 동탁 곁에 앉는 것을 지켜봤다. 웃고 있지만 행복해 보이지 않는 초선의 얼굴. 초선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는 동탁의 얼굴. 그 모습에 여포의 마음속에 있던 분노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괴물로 만들고 이용하려 하는 세상, 그리고 그 세상의 일부인 동탁.
그리고 그 안에서 괴로워하는 초선. 초선은 동탁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할까. 그녀에게도 자유가 필요할까. 정원 숲에서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정원에게서 벗어나려 했던 것처럼.
여포는 뒤돌아섰다. 피 묻은 발자국이 복도에 다시 찍혀나갔다.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방 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차가운 바닥에 앉았다. 피 묻은 갑주와 칼. 그리고 자신의 손에 묻은 피.
정원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그가 자신에게 가르치려 했던 것들. 인간적인 삶, 옳고 그름, 역사. 그 모든 것이 이제 피로 더럽혀진 자신에게는 너무 멀리 느껴졌다.
자신은 결국 정원이 만들지 않으려 했던 짐승이 되어버린 걸까. 아니면 인간이 되지 못할 운명이었을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줄 존재는 정말 없는 걸까. 초선 외에는.
외로움이 그녀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자신을 괴물이라고 믿어야만 버틸 수 있었던 세상은 여전히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다.
손에 쥔 칼날이 차갑게 느껴졌다. 앞으로도 이 칼로 수많은 피를 보게 될 것이다. 동탁의 명에 따라, 세상을 향해 칼을 겨누며.
하지만 이제 그녀의 곁에는 작은 빛이 있었다. 초선. 그녀에게 상처 입었다고, 길을 잃었다고 말해준 유일한 존재.
여포는 눈을 감았다. 피 냄새 가득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초선의 따뜻한 손길을 떠올렸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결심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다. 동탁의 세상에 대한 분노, 그리고 초선을 향한 마음. 두 감정이 섞여 새로운 피의 역사를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