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광기의 전조

또 다른 광기의 전조

동탁의 그림자는 넓고 어두웠다. 여포는 그 그림자 속으로 발을 디뎠다. 성 안 복도는 길고 끝이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찍힌 핏자국이 그녀가 걸어온 길을 선명하게 보여줬다. 발걸음은 무거웠고, 심장 소리가 귀에서 울렸다.

동탁은 앞서 걸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등은 넓고 단단해 보였다. 정원과는 다른 종류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정원은 그녀에게 틀을 강요했지만, 동탁은 그녀의 힘을 탐했다. 결국 자신을 통제하려는 존재라는 점에서 다를 바 없었다.

여포는 오른손의 칼을 더 세게 쥐었다. 차가운 강철의 감촉이 손바닥에 파고들었다. 칼날에는 아직 정원의 피가 옅게 묻어 있었다. 피 묻은 칼날은 그녀가 저지른 일의 증거였다. 동시에 그녀가 얻은 힘의 상징이기도 했다.

아비의 자리를 대신할 주군, 동탁. 그는 그녀에게 천하와 영광을 약속했다. 하지만 여포의 마음속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동탁의 눈빛에는 진심이 아닌 탐욕만이 번뜩였다.

그녀는 자신을 믿지 않았다. 자신은 인간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괴물이라고 생각했다. 숲에서 버려졌고, 정원에게 감금당했으며, 이제 동탁의 도구가 되려 한다. 어디에도 진정한 소속감은 없었다. 외로움과 분노, 그리고 알 수 없는 광기가 마음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렸다.

갑자기 동탁이 걸음을 멈췄다. 여포도 자연스럽게 걸음을 멈췄다. 동탁은 어둠 속에 서서 감정을 숨긴 얼굴로 여포를 돌아봤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천하에 알려질 것이다." 동탁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낮게 울렸다.

여포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름. 그녀에게 처음으로 이름이 생긴 것은 정원 곁에서였다. 그 이름은 이제 피로 더럽혀졌다.

"나를 따라오너라. 네게 보여줄 것이 있다." 동탁이 몸을 돌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여포는 망설이지 않고 동탁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돌아갈 곳도, 갈 곳도 없었다. 동탁의 뒤를 따르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들은 복도를 지나 큰 홀에 도착했다. 홀 안은 횃불이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홀 안에는 이미 몇 명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모두 무장을 갖춘 병사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동탁은 그들에게 다가갔다. 병사들은 동탁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시선은 여포에게 향했다. 여포는 그들의 시선에 익숙했다. 경계, 두려움, 그리고 호기심. 늘 그녀에게 쏟아지는 시선들이었다.

"이 아이가 여포다." 동탁이 병사들에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이제부터 너희는 이 여포의 지휘를 받게 될 것이다."

병사들의 눈이 커졌다. 여포의 어린 외모와 강렬한 분위기에 놀란 듯했다. 그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수군거렸다. ‘어린 아이에게 지휘를 받으라고?’ ‘장군님 딸이라더니… 어쩐지 분위기가 다르다.’

여포는 병사들의 속삭임을 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정원과 싸우면서 모든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였다. 주변의 작은 소리도 그녀의 귀에 거슬렸다.

"여포야, 이들은 이제부터 네 부하들이다." 동탁이 여포에게 말했다. "이들을 이끌고 나를 위해 싸워라."

여포는 동탁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복잡했다. 도구. 동탁은 자신을 전쟁의 도구로 사용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도구가 필요했다. 자신의 명령을 따르는 손발이.

여포는 천천히 병사들을 둘러봤다. 무장한 남자들. 자신보다 키도 크고 몸집도 크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망설임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자신에게서 느껴지는 야성적인 기운에 압도된 듯했다.

여포는 피 묻은 칼을 들고 그들 앞에 섰다. 그녀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무표정했지만, 위압감이 흘러 나왔다.

"…따르라." 여포가 짧게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냉기가 병사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병사들은 여포의 눈빛을 피했다. 누구 하나 감히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들은 여포의 강렬한 기운에 압도당했다.

동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여포가 가진 무시무시한 힘과 분위기는 그의 예상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녀는 분명 천하를 손에 넣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보아라, 여포의 능력을." 동탁이 병사들에게 말했다. "그녀는 너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힘을 지녔다. 그녀의 명령에 복종하고, 그녀를 따라 싸워라. 승리는 우리 것이다."

병사들은 동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피에 젖은 여포의 모습과 그녀의 광기 어린 눈빛에 위협을 느꼈다.

여포는 병사들 사이를 걸어 다녔다. 그녀가 다가갈 때마다 병사들은 주춤거리며 길을 비켜주었다. 그녀의 피 묻은 발자국이 홀 바닥에도 찍혀갔다.

그녀는 병사 중 한 명 앞에 섰다. 그 병사는 다른 이들보다 더 긴장한 듯 보였다. 여포는 칼날 끝으로 병사의 갑옷을 톡톡 두드렸다.

"약하다." 여포가 말했다.

병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얼굴이 창백해졌다.

여포는 다른 병사에게 다가갔다. "겁에 질렸군."

그 병사 역시 고개를 숙였다.

여포는 모든 병사들을 지나쳤다. 그녀는 그들의 약함과 두려움을 단숨에 간파했다. 숲에서 살아남기 위해 길러진 그녀의 예민한 감각이 인간 사회에서도 유효했다.

"더 강해져야 한다." 여포가 말했다. "아니면 죽는다."

그녀의 말은 짧았지만, 강력한 경고였다. 병사들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새로운 지휘관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존재인지 깨달았다.

동탁은 여포의 모습을 지켜보며 더욱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 병사들을 단숨에 휘어잡는 여포의 카리스마는 그가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됐다, 여포야." 동탁이 말했다. "이제 나가서 네 힘을 보여줘라."

여포는 동탁을 돌아봤다.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광기와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 그녀는 정원의 곁에서 벗어났지만, 진정한 자유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이제 동탁의 전쟁터로 보내질 것이었다.

칼날을 쥔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전장. 피와 살이 튀는 난폭한 곳. 그곳이야말로 숲 속 짐승처럼 살아온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공간일지도 몰랐다.

여포는 홀 밖으로 걸어 나갔다. 병사들은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녀가 지나간 길에는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녀는 피로 물든 길을 따라 새로운 시작을 향해 나아갔다. 하지만 그 시작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자신조차도.

동탁은 여포가 홀을 나서는 뒷모습을 지켜봤다. 그의 얼굴에는 승리자의 미소가 가득했다. 그는 여포를 이용해 더 큰 권력을 얻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동탁조차도 여포 안에 잠재된 광기와 파괴성이 어디까지 뻗어나갈지는 예측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둠 속에 숨어 있던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홀의 가장 깊숙한 곳,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기둥 뒤였다.

그는 동탁과 여포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다. 여포의 핏빛 모습과 광기 어린 눈빛, 동탁의 탐욕스러운 미소까지. 모든 것을 지켜본 그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여포가 홀을 나서는 방향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여포의 뒷모습에 고정되었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조소가 떠올랐다.

"흥미로운 광경이군."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감정이 배제된 듯했지만, 그 속에 은근한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그는 여포가 떠난 자리에 남은 핏자국을 잠시 바라봤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홀을 나섰다. 그 역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여포는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오직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피로 물든 길 위에서, 자신 안에 잠재된 파괴성을 터뜨리며. 그리고 그녀를 지켜본 자는 이제 새로운 판을 짜기 시작할 것이었다. 동탁과 여포, 그리고 그들 사이를 파고들 또 다른 그림자. 삼국지의 역사는 이제 피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