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밤이 깊었다. 동탁의 저택은 여전히 고요했다. 낮 동안의 소란스러움이 가시고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여포와 초선은 여포의 방에 함께 있었다. 횃불은 꺼져 있었고, 창밖에서 희미한 달빛이 스며들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여포와 그 곁에 앉은 초선은 그림자 속에 잠겨 있었다.
오랜 침묵이 흘렀다. 초선은 여포의 곁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여포는 초선이 자신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기다려주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동탁 곁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평온함이었다.
“전에… 궁금해했잖아.” 여포가 작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낮게 울렸다.
초선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빛은 어둠 속에서도 온화했다. “네, 장군님.”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 여포가 말을 이었다. 그녀는 시선을 초선에게서 피하고 허공을 바라봤다.
초선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여포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주기를 기다렸다. 강요하지 않고, 인내심을 가지고.
여포는 심호흡을 했다. 숲에서 버려진 이후, 자신의 과거를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정원에게도, 동탁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나는… 숲에서 버려졌어.” 여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건조했지만, 그 속에 담긴 아픔은 숨길 수 없었다. “열다섯 살 때.”
초선의 눈이 살짝 커졌다. 열다섯. 그 어린 나이에 홀로 숲에 버려졌다니.
“왜… 왜 버려지셨나요?” 초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포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과거의 기억이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차가운 시선, 자신을 밀어내던 손들. 그녀는 스스로를 괴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괴물은 세상이 만들었다고 믿었다.
“…몰라.” 여포가 결국 대답했다. 그녀는 정말 몰랐다. 왜 버려졌는지, 무엇 때문에 인간 사회가 자신을 거부했는지.
“숲에서… 혼자 살았어.” 여포가 말을 이었다. “짐승처럼. 먹을 것을 찾고, 숨을 곳을 찾고. 살아남기만 했어.”
초선은 여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여포가 겪었을 고통과 외로움을 상상하려 했다. 어린 소녀가 홀로 숲에서 짐승처럼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견뎌야 했을까.
“그때… 정원을 만났어.” 여포가 다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가 나를 데려왔어. 인간으로 만들려고 했지.”
여포는 정원과 함께 지냈던 시간들을 이야기했다. 혹독한 훈련, 끝없는 규율, 외부와의 단절. 정원이 자신을 강하게 단련시켰지만, 동시에 그녀의 자유를 억압하고 통제했던 이야기. 그리고 정원에게서 느꼈던 답답함과 미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정원 곁에서도 외로웠어.” 여포가 말했다. “그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어. 내가 가진 힘을 인정했지만, 동시에 두려워했지.”
초선은 여포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여포는 움찔했지만, 손을 빼지 않았다. 초선의 손은 따뜻했고 부드러웠다.
“그리고… 동탁이 나타났어.” 여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동탁의 이름은 그녀에게 깊은 불쾌감을 안겨주었다. “정원은 동탁을 경계했지만… 나는 동탁에게 갔어.”
여포는 동탁이 자신에게 속삭였던 달콤한 유혹에 대해 이야기했다. 천하, 영광, 자유. 정원이 결코 주지 않았던 것들. 그리고 동탁을 따라가기로 결심했던 이유. 정원에게 상처받았던 마음, 인정받고 싶은 욕심, 그리고 자신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절망감.
이야기는 마지막으로 이어졌다. 자신을 막아서는 정원, 그리고 결국 정원을 자신의 손으로 베었던 밤 이야기. 피 묻은 복도, 동탁의 만족스러운 미소, 그리고 피에 젖은 채 동탁의 곁에 섰던 순간.
여포는 이야기를 마치고 다시 침묵에 잠겼다. 그녀의 어깨가 작게 떨렸다. 초선은 그런 여포의 손을 놓지 않고 더욱 단단히 잡았다.
“장군님…” 초선이 나지막이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는 안타까움으로 가득했다. “정말… 힘드셨겠어요.”
여포는 대답하지 않았다. 과거의 상처가 다시 덧나는 것 같았다. 스스로를 괴물이라고 믿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던 나날들.
초선은 여포의 손을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여포의 손은 거칠고 차가웠다. 전장에서 수없이 칼을 휘두른 손이었다.
“그때는… 정말… 외로웠겠구나.” 초선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초선의 말에 여포의 눈가에 뜨거운 것이 맺혔다. 외로웠냐고? 늘 외로웠다. 숲에서 혼자였고, 정원 곁에서도 혼자였으며, 동탁 아래에서도 변함없이 혼자였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했다.
“초선아.” 여포가 초선을 불렀다. 처음으로 초선의 이름을 불렀다.
초선은 여포의 눈을 바라봤다. 달빛 아래 희미하게 빛나는 여포의 눈동자에서 그녀는 깊은 슬픔과 혼란을 보았다.
여포는 초선의 손을 잡은 채 말했다. “나는… 네가 왜 나에게 잘해주는지… 모르겠어.”
초선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냥요. 장군님 곁에 있고 싶어서요.”
이유가 없는 친절함. 여포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낯선 것이었다. 계산적이지 않은 온기. 그것은 그녀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듯했다.
“초선아… 나는… 너를…” 여포가 말을 흐렸다.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사랑. 그녀에게는 너무나 생소하고 두려운 감정.
초선은 여포의 마음을 읽은 듯했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여포에게 기대어 얼굴을 묻었다. 여포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초선이 말했다. “알아요, 장군님.”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변했다. 더 이상 짐승과 인간, 강자와 약자의 관계가 아니었다. 서로에게 의지하고 위로받는 두 외로운 영혼이었다. 여포는 초선을 통해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녀에게 작은 희망을 안겨주었다. 자신 같은 괴물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는 희미한 희망.
이날 밤 이후, 여포와 초선의 관계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그들은 서로에게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서로의 상처를 위로했다. 초선은 여포의 곁을 지켰고, 여포는 그런 초선에게 점점 더 마음을 열었다. 그들의 관계는 단순한 우정을 넘어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깊어졌다.
이제 초선은 더 이상 여포 곁에서 조용히 듣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는 여포에게 거침없이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여포의 행동에 대해, 동탁의 계획에 대해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장군님, 오늘 전투에서 너무 과하셨습니다. 병사들이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여포는 처음에는 초선의 말에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죽든가 말든가. 약하면 죽는 게 당연해."
하지만 초선은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장군님은 그들을 이끌어야 하는 분이세요. 두려움으로 이끄는 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몰라.” 여포는 대답 대신 회피했다. 하지만 초선의 말은 그녀의 마음속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병사들의 두려움. 자신을 괴물로 바라보는 시선. 그것은 숲에서 버려졌을 때부터 익숙했던 것이었다.
또 다른 날, 동탁이 반대파를 잔인하게 처형했을 때, 초선은 여포에게 말했다. “동탁 장군님의 방식은 너무 잔인합니다. 백성들의 원한이 쌓일 것입니다.”
“동탁의 방식은 내 알 바 아니야.” 여포가 건조하게 말했다. 그녀는 자신을 세상에 칼을 겨누는 도구로 여겼다. 세상이 자신을 괴물로 만들었으니, 세상은 그녀의 칼날에 고통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초선은 여포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장군님께서 그런 피의 길을 함께 걷는 것은… 장군님을 더욱 고립시킬 뿐이에요.”
여포는 초선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고립. 그녀는 이미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존재였다. 하지만 초선은 그 고립된 세상 안으로 들어와주었다.
초선은 여포의 어두운 내면을 보았고, 그 안에 숨겨진 상처와 외로움을 보았다. 그녀는 여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인정, 사랑, 그리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줄 존재.
초선은 여포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장군님께서는… 괴물이 아니세요. 그저… 길을 잃으셨을 뿐이에요.”
길을 잃었다는 표현은 여포에게 생경했다.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을 뿐이었다. 하지만 초선의 말을 들으며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자신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동탁의 칼날이 되어 피의 길을 걷는 것이 자신이 원하는 길일까.
초선은 여포에게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 피와 잔혹함이 아닌, 인간적인 관계와 감정이 존재하는 세상. 여포는 이제 두 개의 세상 사이에서 갈등하기 시작했다. 하나는 익숙한 피의 전장, 다른 하나는 초선을 통해 알게 된 낯선 온기의 세상.
동탁은 여전히 두 사람의 관계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여포를 자신의 강력한 무기로만 여겼고, 초선은 자신의 총애를 받는 여인으로만 여겼다. 그의 세상은 오로지 권력과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두 여인 사이에 싹튼 진심과 사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여포는 초선의 말과 존재를 통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광기 어린 눈빛 속에서 슬픔의 그림자가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자신을 괴물로 만든 세상에 칼을 겨누는 것이 유일한 반응이라고 믿었던 여포는 이제 혼란스러워졌다. 초선이라는 작은 빛이 그녀의 어둠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작은 변화가 앞으로 어떤 거대한 파장을 불러일으킬지는 아직 예측할 수 없었다. 동탁의 절대 권력에 균열을 일으킬 씨앗이 깊은 밤 두 여인의 방에 심어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