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틀어지는 모녀관계
시간이 흘렀다. 숲 속 짐승 같던 소녀는 정원 곁에서 인간의 모습을 갖춰갔다. 그에게 이름도 받았다. 여포(呂布). 정원은 그녀를 호적에 올리고 자신의 딸처럼 대했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다정한 부녀 관계 같았다.
하지만 여포에게 정원은 좋은 아버지라 할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보통의 아버지였다면 좋았을지도 몰랐다. 정원은 여포를 특별하게 만들고자 했다. 그녀의 야성적인 힘과 잠재력을 알아본 그는 여포를 강하게 단련시켰다.
외출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정원은 그녀에게 세상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외부와 단절시켰다. 용돈 같은 것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오직 훈련과 규율만이 주어졌다.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산더미 같았다. 정원이 정해놓은 틀 안에서만 움직여야 했다.
훈련은 혹독했다. 검술, 창술, 전술… 끝없이 이어지는 단련 속에서 여포의 몸은 더욱 강건해졌다. 정원은 그녀에게 글을 가르치고, 역사를 읽게 했다. 숲 속에서 본능으로만 살아가던 그녀에게 세상의 지식을 주입했다.
정원은 여포를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다.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게 하고 싶었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어 그녀를 가르치고 단련했다. 하지만 여포는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정원은 자신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자유를 빼앗고, 숨통을 조이는 감시자.
미움이 커졌다. 정원의 엄격함은 그녀에게 사랑이 아닌 구속으로 다가왔다. 숲에서 벗어나 인간 사회에 정착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외로웠다. 정원 곁에서도 그녀는 이방인 같았다.
어느 날이었다. 훈련이 너무 힘들었고, 정원의 잔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여포는 처음으로 정원에게 반항했다. 대꾸조차 하지 않던 그녀가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고, 정원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정원은 실망한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더 강경하게 그녀를 몰아붙였다. 여포는 입을 다물었지만, 속으로는 분노에 휩싸였다.
며칠 후, 여포는 정원의 돈을 훔쳤다. 많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첫 번째 일탈이었다. 그 돈으로 그녀는 몰래 성 밖으로 나갔다. 북적이는 시장 거리, 낯선 사람들의 모습은 그녀에게 두려움과 동시에 묘한 흥분을 안겨주었다. 자유를 맛본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들키고 말았다. 정원은 크게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차갑게 식은 눈으로 여포를 바라봤다. 그 눈빛은 여포에게 숲에서 버려졌을 때 느꼈던 것만큼이나 차가웠다. 배신감과 실망감이 뒤섞인 눈동자. 그날 이후로 정원과 여포의 관계는 눈에 띄게 틀어졌다. 정원은 더욱 엄해졌고, 여포는 마음의 문을 더 굳게 닫았다.
바로 그때였다. 불화의 골이 깊어지고 여포의 마음이 갈 곳을 잃고 방황하던 시기. 동탁이 나타났다. 마치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것처럼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동탁은 종종 정원을 방문했다. 두 사람은 정치적인 문제나 군사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여포는 그들의 대화에 끼지 않고 조용히 그들의 옆에 있었다. 동탁은 그녀를 눈여겨보는 듯했다. 그의 시선이 느껴질 때마다 여포는 불편함을 느꼈다. 숲 속에서 인간을 경계하던 본능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정원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동탁이 여포에게 말을 걸었다.
“정원의 딸아.” 동탁의 목소리는 기름진 듯 부드러웠다.
여포는 대답 없이 그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묘한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너는 참으로 대단한 무장이다. 어린 나이에 어찌 그런 힘과 용맹을 가질 수 있느냐.”
동탁은 칭찬을 쏟아냈다. 정원에게서는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들이었다. 정원은 늘 그녀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고 더 나아지라고 채찍질했다. 하지만 동탁은 그녀가 가진 힘 자체를 인정했다.
여포는 그의 말을 들으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얼어붙었던 마음에 따뜻한 물이 스미는 듯했지만, 동시에 경계심은 더욱 커졌다. 그의 칭찬은 너무나 달콤해서 오히려 의심스러웠다.
“정원은 네게 엄하게만 대하는 듯하더구나.” 동탁이 말했다. “물론 그 나름의 이유가 있겠으나, 네 능력을 제대로 알아봐주지는 못하는 듯하여 안타깝다.”
그는 정원과의 관계가 틀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여포의 약점을 파고드는 말이었다. 정원에게 상처받았던 마음이 다시 아려왔다. 인정받고 싶었다. 정원에게서, 세상에게서.
동탁은 여포의 눈빛을 읽었다. 그는 더욱 노골적으로 여포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너 같은 인재는 더 넓은 세상에 나가 빛을 발해야 한다. 정원의 좁은 틀에 갇힐 아이가 아니다."
그는 여포가 가진 힘과 재능을 극찬하며, 자신이 그녀에게 더 큰 기회를 줄 수 있다고 속삭였다. 정원 곁에서는 절대 누릴 수 없는 영광과 자유.
여포는 동탁의 말을 들으며 혼란스러웠다. 그의 말은 매력적이었지만, 그의 눈빛과 분위기에서는 위험한 기운이 느껴졌다. 숲에서 만났던 정원의 따뜻함과는 다른 종류의 기운이었다.
"...왜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여포가 겨우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동탁은 빙긋 웃었다. "네게서 큰 가능성을 봤기 때문이지. 너는 아직 네 힘의 진가를 알지 못한다."
그는 여포의 손을 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 여포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피했다. 동탁의 눈빛에 순간적으로 불쾌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사라졌다.
"곰곰이 생각해 보거라." 동탁은 여포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정원 곁에서 네 힘을 썩힐지, 아니면 나 동탁과 함께 천하를 손에 넣을지."
그는 여포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남기고 자리로 돌아갔다. 여포는 그 자리에 서서 동탁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천하. 영광. 인정. 정원에게 받지 못했던 것들.
동시에 불안감도 커졌다. 동탁의 눈빛. 거기에는 자신을 무장으로서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다른 무언가가 있는 듯했다. 마치 그녀를 이용하려는 것처럼. 마치 숲 속 짐승을 길들여 전장의 도구로 쓰려는 것처럼.
그날 밤, 여포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천장만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정원과 동탁. 자신에게 두 개의 길이 제시되었다. 하나는 익숙하지만 답답하고 상처뿐인 길, 다른 하나는 위험하지만 매력적인 미지의 길.
자신을 괴물로 만든 것은 세상이라고 믿었다. 그래야 버틸 수 있었다. 정원도, 동탁도, 결국은 자신을 이용하거나 두려워하는 인간들일까?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줄 존재는 정말 없는 걸까.
방황하는 여정은 계속되고 있었다. 스스로조차 자기 존재를 믿지 못하며 살아가는 나날. 그녀는 아직 알지 못했다. 동탁의 유혹이 자신을 어디로 이끌고 갈지. 그리고 정원과의 관계가 어떻게 파국으로 치달을지. 그저 불안한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