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램프 아래,
보고서 양식이 비어 있었다.
제이의 활자를 두드리는 손가락 끝은 몇 번이나 멈췄다.
‘관찰 대상: NU-1
코드명: 누안.
반응 지연 없음 / 교감 시도 확인.’
그러나 그 아래로 문장은 번번이 어긋났다.
"피험자 A는 수화에 대한 인지 반응을 보였다.
감정적 요소는 관측되지 않음.
단, 눈빛이…… 눈빛이……"
중얼거리며 보고서를 작성하던 제이는 계속해서 같은 지점에서 문장을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다가 결국은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는 눈을 감으며 차가운 철제 프레임에 등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녀의 감은 눈앞엔 아직도 어젯밤의 장면이 선명하게 펼쳐졌다.
누안이 손끝으로 제이를 향해
‘너’를 가리키던 순간.
아무 말도 없었지만,
확실히 존재했던 그 감정.
‘관측되지 않음’이라 쓰기엔,
너무나 분명한 ‘응답’이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키보드를 덮고, 얼굴을 감쌌다.
보고서를 쓰는 게 아니라, 기억을 지우려 애쓰는 것 같았다.
“박사님, 이거 NU-1 관련 기록인데요.”
유리문 너머에서 부드러운 노크음이 들렸다.
제이는 재빨리 태블릿을 뒤집고 자세를 고쳤다.
들어온 사람은 스즈키, 알렉세이의 직속 연구 보조관이었다.
언제나처럼 단정한 태도와 감정 없는 목소리.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가끔 너무 예리했다.
“기록 누락이 있어서 확인 부탁드립니다.
지난주 모션 센서 로그에 ‘미확인 반응’이 찍혔어요. 장치 오류일 수는 있지만,”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감시 조정실 쪽에서 문의가 들어올 수도 있어요.”
제이는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확인해볼게요.”
“네. 혹시… NU-1, 상태는 어떻습니까?”
스즈키에 잠짓 아무렇지 않게 묻는 질문이였지만 그 안의 거짓을 말하면 모두
밝혀낼 것이라는 날카로운 느낌을 느끼며,
제이는 스즈키의 시선을 피한채 다시 키보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반응은... 점점, 안정되고 있어요. 익숙해지고 있다는 뜻이죠.”
제이의 말에 그녀의 눈을 한참 바라보던 스즈키는 긍정의 표시로
히미한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연구실을 빠져 나갔다.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제이는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늦은 오후,
스즈키가 가져다 준 누안에 관한 옛 자료들을 실험실 쪽 보관 서랍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그것을 발견했다.
한 권의 낡은 노트.
검은 테이프로 가장자리가 찢어진 채 붙어 있었고,
종이 사이에 작은 봉투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봉투는 아주 오래된 듯, 가장자리가 누렇게 바래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꺼내 펼쳤다.
그 안엔 짧은 문장 하나가 적힌 메모지가 들어 있었다.
가느다란 필체. 수화 기호가 그려진 작은 손그림.
그리고 그 아래,
“너는 너로 충분해.”
한순간,
실험실의 모든 소음이 사라진 듯했다.
제이는 그 문장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이건 누군가가,
누안에게 전하려 했던 말이었다.
감정 없는 존재,
기록만을 위한 대상,
비어 있는 객체.
그녀가 지금까지 정의했던 ‘NU-1’이라는 존재가
그 문장 하나로 단번에 무너졌다.
“....이건, 누구지.”
누안은 이 편지를 본 적이 있을까?
아니면 잊은 걸까.
아니면, 일부러 기억하지 않는 걸까.
제이는 봉투를 다시 접어 넣고,
조심스럽게 노트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그러나 손끝에는 여전히 종이의 감촉이 남아 있었다.
마치 그것이 자신에게 쓰인 것처럼.
밤늦게 연구소를 나서며,
제이는 유리벽 너머를 바라보았다.
누안은 불 꺼진 방 안에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제이는 이상하게도 자신이 그를 부르면 고개를 돌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손끝이 간질거렸다.
보고서가 아닌 무언가를... 쓰고 싶었다.
더는 객관적인 문장이 아닌,
단 한 사람을 향한 문장을.
그래서 그는 그날 밤,
처음으로 보고서가 아닌 편지를 썼다.
쓰고, 찢고, 다시 쓰고...
마지막엔 겨우 세 문장만 남았다.
“어젰밤, 당신이 나를 바라보고,
가르키며 ‘너’를 말했을 때,
나는 ‘나‘를 처음 본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때 당신의 눈을 보고 싶습니다.”
그 편지는 어디에도 제출되지도, 전해지지도 않았다.
단지 그녀의 숙소 책상 서랍 안,
가장 깊은 칸에 묻혔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
제이의 시선은 점점 더 관찰의 목적을 잃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