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는 실험실 문을 조용히 닫았다.
유리벽을 통과한 빛이 누안의 어깨에 닿아 희미한 그림자를 바닥 위에 남겼다.
오늘도 모든 실험이 끝난 실헙실의 기록장치는 꺼져 있었고,
실험 일정은 ‘취소’로 변경된 상태였다.
모두가 퇴근한 저녁 8시,
물 밖으로 나온 누안은 익숙한 듯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흰 실험복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뚝이 불안하게 가늘었고, 깍지를 낀 손등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든 눈동자만은, 물결처럼 일렁이며 제이의 움직임을 쫓고 있었다.
제이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그 눈을 바라보았다.
말이 없으니 모든 게 느리게 흐르는듯한 느낌을 받으며 제이는 조심히 누안의 앞에 섰다.
제이의 눈빛은 자신이 하는 행동에 대한 불안을 숨기지 못하고 누안에게 더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그... 오늘은... 감각 자극 테스트를 할거예요.”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이며 책상 위에 얇은 보드 하나를 꺼냈다.
누안에게는 실험이라 이야기 했지만 공식 실험도 아니 거니와,
제이는 이 행위에 관한 기록은 남기지 않을 생각이었기에 평소 실험 전 과학자들이
시행하는 녹음기를 켠다든지 누안의 앞에 카메라를 설치한다든지 하는
행동 대신 그의 맞은편에 두었던 철제 의자에 앉았다.
“시각 반응 유도. 간단한 신호에 반응하도록…”
말을 끊고 고개를 든 제이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천천히, 손끝으로 자기 가슴을 짚었다.
“나.”
누안은 그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빛도, 바람도 닿지 않는 무음의 방 안에서, 그 작은 손짓이 파문처럼 번져갔다.
다시, 제이는 손끝으로 누안을 가리켰다.
“너.”
누안은 눈을 깜박였다.
이해한 것인지, 그저 반사적인 움직임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눈에는 집중이 있었다.
다시, 제이는 천천히 손동작을 반복했다.
“나.”
“너.”
“…이건 언어입니다,”
그는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말했다.
“한국어 수화. 시각 언어죠. 말 없이 말하는 방식.”
누안은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제이의 손짓을 한 번도 놓치지 않고 따라가고 있었다.
누안의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가
제이의 손 끝을 따라 움직였다.
“내가 ‘나’를 짚으면, NU...누안씨는... 여길 짚어야 해요.”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짚고, 이내 손을 누안의 가슴 앞에서 멈추게 했다.
누안은 제이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아주 천천히 자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따라 하듯, 조심스레 자신의 가슴을 짚었다.
작은 동작, 떨리는 손끝.
제이의 숨이 느리게 멈칫했다.
“좋아요. 그다음은 ‘너’입니다.”
그녀는 다시 손끝을 뻗어, 누안 쪽을 가리켰다.
“제가 이렇게 하면, 누안씨는 날 가리켜야 해요.”
누안은 이번에는 제이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빛엔 이전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단순한 반응도, 무감한 수용도 아니었다.
그건 감정이었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하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감정.
천천히, 누안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제이를 향해, 조심스럽게 손끝을 뻗었다.
‘너.’
제이의 시야가 잠시 흔들렸다.
그는 그 손끝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 조용한 움직임 하나가 온 실험실을 울렸다.
“…잘했어요,”
제이의 목소리가 다소 갈라졌다.
“지금 그게, 바로 ‘너’예요.”
누안은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가 말하고 있었다.
말보다 선명하게, 말보다 부드럽게.
제이는 그 눈빛을 외면하지 못했다.
그 안엔 무언가가 있었다.
이해, 의지, 그리고 아주 미세한 미소의 흔적.
혹은 그보다 더 깊은 감정의 단서.
조금의 침묵.
실험실은 다시 고요에 잠겼고,
제이는 숨을 고르며 책상 가장자리에 손을 얹었다.
한 번이라도 더 손끝을 마주하고 싶다는 충동이 지나가듯 스쳤다.
그때,
책상 아래에 놓인 작은 빨간 불빛 하나가 깜박이기 시작했다.
기록 장치의 잔여 전원 신호.
모두다 끈 줄 알았던, 꺼진 줄 알았었는데 제이도 모르는 위치에 있던
한 개의 센서가 아직 살아 있었다.
제이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누안에게 불안을 심어주고 싶지 않아
빨간불이 반짝이는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저, 누안을 향해 마지막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나.’
‘너.’
누안은, 이번에는 먼저 손을 들었다.
그녀를 가리켰다.
그리고 오래도록, 눈을 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