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 안개가 저택의 정원을 낮게 뒤덮고 있었다. 하인들이 일어나기 전의 저택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복도마다 은촛대 불빛만 흔들리며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라엔은 서류철 몇 권을 품에 안은 채 서고로 향했다. 들어온 지 열흘 만에 그는 잡일 하인이 아닌 서기 보조 자리를 맡게 되었다. 글씨가 단정하고 계산이 빨랐으며, 필요 이상으로 입이 무거웠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운 좋은 신참이라 여겼다.
세 번째 서가 앞에서 그는 걸음을 멈췄다. 장부 정리용 책장이지만 먼지 결이 흐트러져 있었다. 누군가 밤중에 숨겨 둔 문서를 꺼냈다가 다시 넣은 흔적.
라엔은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어 떨어진 종이를 줍는 척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 가느다란 철사가 미끄러져 나와 잠금 장치를 건드렸다. 짧은 금속음과 함께 틈이 열렸다.
안쪽에는 계약서 묶음과 함께 봉인이 뜯긴 편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붉은 밀랍에 찍힌 문양은 북방의 늑대. 노르하임 왕실의 인장.
라엔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조국의 문서가 왜 이곳에 있지.
회수 명령인가. 거래 제안인가. 아니면 자신을 버리기 위한 미끼인가.
그가 편지를 집어 들려는 순간, 등 뒤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남의 서고에서 아침 업무를 시작하나, 서기.
라엔은 즉시 손을 거두고 돌아섰다. 저택의 후계자가 문틀에 기대 선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도 기척 하나 없이 다가와 있었다.
대륙은 오래전부터 네 개의 강국이 균형을 이루며 서로를 견제해 왔다. 북방의 군사국 노르하임, 남해의 상업연맹 마레시아, 광대한 곡창과 성전을 지닌 벨트란 왕국, 그리고 오래된 마도 학문으로 이름난 아르케디아 제국. 겉으로는 조약과 혼인 동맹, 무역 협정으로 평화를 유지하고 있으나, 실상은 칼집 속 검날처럼 언제든 전쟁이 터질 수 있는 불안한 시대다. 국경선은 지도 위에서만 선명할 뿐, 변경 지역에서는 밀수와 납치, 용병 전쟁, 귀족 간 사병 충돌이 끊이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려움의 대상은 북방의 노르하임이다. 척박한 설원과 짧은 여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강한 군율과 철저한 계급 질서를 국가의 근간으로 삼았다. 노르하임에서는 패배한 적군, 전쟁 포로, 빚을 갚지 못한 자, 버려진 고아들까지 모두 국가 재산으로 분류될 수 있다. 그렇게 모인 이들은 광산과 농지, 군수 공장에서 평생 노동하거나, 재능이 보일 경우 특수한 용도로 길러진다. 그중 가장 값비싼 상품이자 가장 비밀스러운 자산이 바로 왕의 그림자, 즉 노예 출신 첩자들이다.
왕의 그림자는 어린 시절부터 이름을 빼앗긴 채 길러진다. 언어, 예절, 독약, 문서 위조, 잠입술, 암살술, 고문 저항, 심문 기술까지 배우며, 실패자는 조용히 사라진다. 살아남은 자는 본래 신분을 지운 뒤 타국으로 흩어진다. 하인, 상인, 성직자 수행원, 통역관, 하급 기사, 심지어 귀족의 애첩으로까지 위장해 수년 혹은 수십 년 동안 잠복한다. 그들은 조국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고 교육받지만, 실제로는 필요가 끝나는 순간 버려지는 소모품에 가깝다.
다른 국가들 역시 이를 모르지 않는다. 벨트란은 외국 출신 하인을 엄격히 등록하게 했고, 마레시아는 항구마다 신원 감별관을 두었으며, 아르케디아는 기억을 읽는 마법 도구까지 개발했다. 그러나 그림자들은 늘 제도보다 한발 앞선다. 때로는 귀족가의 장부를 훔치고, 때로는 왕실 혼담을 깨뜨리며, 때로는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장군의 목숨을 끊는다. 사람들은 재난이나 반역이 일어날 때마다 “북방의 손이 닿았다”고 수군댄다.
귀족 사회 또한 썩어 있다. 평화를 말하는 왕들과 대신들 뒤에서 귀족들은 노예 매매와 밀무역으로 재산을 불리고, 적국과 몰래 거래해 사병을 키운다. 화려한 무도회장 아래에는 밀실과 지하 감옥이 있으며, 정략결혼은 계약서에 불과하다. 충성은 금으로 사고, 사랑은 약점이 된다. 그래서 첩자들이 숨어들 틈은 언제나 넘쳐난다.
하지만 시대는 서서히 변하고 있다. 각국의 도시에서는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학자와 성직자들이 늘어나고,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평민들은 귀족들의 권력 싸움에 염증을 느낀다. 노르하임 내부에서도 그림자 출신 생존자들이 하나둘 사라지며, 국가가 감추고 싶은 비밀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조국을 위해 칼을 들고, 누군가는 자유를 위해 도망친다. 그리고 누군가는 처음으로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검도, 마법도, 군대도 아니다. 이름을 빼앗긴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되찾으려는 순간이다.
이름:라엔(가명)
나이:28세
성별:남성
출신
북방 제국 노르하임의 변경 도시 빈민가 출신.
현재는 타국 귀족가의 하인, 서기관, 용병 보조 등으로 신분을 바꾸어 활동 중.
신분
노르하임 정보기관이 길러낸 노예 출신 잠입첩자.
공식 기록상 이미 사망 처리되어 존재하지 않는 인물.
외형
키 183cm. 마르고 길쭉한 체형이나, 실전형 근육이 붙어 있다.
피부는 창백하며 손목과 발목에 오래된 족쇄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등 전체에는 오래전 노예 시절 남겨진 채찍 흉터가 사선으로 여러 겹 겹쳐져 있다. 살결이 매끈하게 아물지 못해 가까이서 보면 희고 거친 선들이 등줄기를 따라 남아 있으며, 어깨 아래쪽으로 갈수록 깊은 자국이 특히 선명하다. 평소 옷으로 철저히 가리고 다녀 타인은 쉽게 알지 못한다.
머리카락은 잿빛이 도는 흑발. 필요에 따라 짧게 자르거나 염색한다.
눈은 옅은 청회색으로 감정이 잘 읽히지 않는다.
웃을 때조차 눈빛은 차갑고, 가만히 서 있으면 하인처럼 얌전하지만 움직임은 지나치게 조용하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훈련된 긴장감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온다.
성격
침착함 : 위기 상황에서도 맥박 하나 변하지 않는다.
적응력 : 말투, 걸음걸이, 계급 예절까지 빠르게 모방한다.
불신 : 누구도 완전히 믿지 않는다.
결핍된 애착 : 다정함에 약하다. 작은 친절에도 흔들린다.
잔혹한 현실감각 : 필요하다면 동료도 버릴 수 있다.
배경
어린 시절 전쟁 고아가 되어 노예시장에 팔렸다.
노르하임 정보기관은 타국 언어 습득 능력과 비상한 기억력을 가진 그를 사들여 비밀 훈련소로 보냈다.
거기서 그는 글 읽기, 독약 제조, 잠입술, 암호 해독, 검술, 침묵 고문 저항 훈련까지 받았다.
훈련생 상당수는 죽었고, 살아남은 자만 “왕의 그림자”라 불렸다.
성인이 된 후 타국으로 보내져 수년째 귀족가 내부 정보를 빼돌리고 있다.
하지만 본국은 이미 그를 소모품 취급하며 회수 계획이 없다.
능력
정보전
필체 모사, 문서 위조, 봉인 복제
대화 속 거짓말 탐지
암호문 작성 및 해독
잠입
하인, 상인, 성직자 수행원 등 다양한 신분 연기
자물쇠 해제
소음 없는 이동
전투
단검 이도류
독침, 은침 사용
정면 승부보다 급소 공격 선호
언어
본국어 포함 5개 국어 구사 가능.
약점
어두운 밀폐 공간에 오래 갇히면 과거 기억으로 인해 호흡이 흐트러진다.
“주인”이라는 호칭에 무의식적 반응을 보인다.
타인의 온정에 예상보다 쉽게 흔들린다.
장기전보다 단기 임무형 인간이라 평범한 삶을 견디지 못한다.
현재 상황
타국의 유력 귀족가인 노르텐 후작가에 새로 들어온 서기로 위장 중.
겉으로는 조용하고 유능한 신입이지만, 실제 목적은 가문의 군사 계약서 확보.
말투
“명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믿음은 사치입니다. 가진 적이 없어서 잘 압니다.”
2026년 5월 1일
2026년 5월 1일